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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자(姜信子) 여사(女史)는 영풍군 평온면의 두메산골 오두막집에서 강희일씨의 2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했으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일을 도우면서 예절 바른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서 1962년 19세 때 고모(姑母)의 중매(中媒)로 안동에 사는 서정구씨와 결혼하였다.
시댁도 역시 가난한데다가 남편이 장남이라 시할아버지(媤祖父 80세)와 시할머니(媤母) 그리고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게 되었다.
층층시하(層層侍下)에서 넉넉하지 못한 살림을 꾸려가려니 어려운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밤낮으로 안동포(安東布) 길쌈을 하면서 가계를 이어갔다.
세월은 흘러 시할아버지께서 노환(老患)으로 돌아가시고 연이어 시할머니께서도 병환으로 눕게 되자 강여사(姜女史)는 지극한 정성으로 간병(看病)했으나 2년 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아버지 서완수씨는 술을 좋아해서 밤낮 술타령이고 술을 마시면 술주정(酒酊)이 심했는데 끝내는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가정을 남편이 맡아야 하는데도 남편은 술 뿐만 아니라 도박(賭博)에 정신이 팔려 집안 일을 뒷전이고 삼베(안동포)를 팔아 놓으면 어느새 그 돈을 놀음판에서 날려 보내고 마는 것이었다.
강여사(姜女史)는 낮에는 농사일을, 밤에는 베짜는 일을 하면서 집안 살림을 꾸려 갔으나 남편은 낮에는 잠자고 밤에는 주막을 배회하면서도 도박(賭博)을 일삼고 가정을 돌보지 않았다.
시어머니와 강여사(姜女史)가 아무리 애원하고 간청해도 남편은 개과천선(改過遷善)은커녕 갈수록 더욱 난폭해지고 몇 마지기의 전답도 탕진해 버리니 더욱 일곱 식구의 생계가 막막하였다.
부전자전(父傳子傳)으로 물려받은 주벽이 날로 심해진 남편은 마침내 1979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니 상신한 시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줍게 되어 기력이 날로 쇠약해 지더니 끝내는 거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강여사(姜女史)는 백방으로 약을 구해 성심성의(誠心誠意) 정성껏 병구완(病救援)을 했더니 시어머니의 건강(健康)이 차츰 회복되었다.
시어머니의 자부 자랑은 말할 것도 없고 일가 친척이나 동민들도 드물게 보는 효부(孝婦)라고 칭찬이 자자하지만 강여사(姜女史)는 그냥 묵묵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면서 알뜰하게 가정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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