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박정지(朴靜枝)

페이지 정보

본문

제33회(1990년 4월 20일)
효행상(孝行賞)
대구직할시 서구 원대동
효부(孝婦) 박정지(朴靜枝) 47세

박정지(朴靜枝) 여사(女史)는 1962년에 남만규씨(南萬圭氏)와 결혼하여 고향인 영덕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으나 유산이라고는 전답 한 평도 없이 날품팔이를 하다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남편의 직장을 따라 식구 모두가 대구로 이주(移住)하게 되었다.

집을 대구로 옮겼으나 남편은 신신화학(학용품, 연필제조)에 종사(從事)하면서 일당 3천원 받는 고용인이라 삭을세방에서 겨우 호구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다가 1983년부터 월 18만원의 봉급을 받게 되었으나 여섯 식구가 살아가기에는 힘드는 박봉(薄俸)이었다.

그런데 그 해 4월,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수족이 마비되어 거동이 부자유스럽게 되었다.

박여사(朴女史)는 시어머니의 식사 시중을 들면서 대소변을 받아 내고 온갖 정성(精誠)을 다하여 병간호(病看護)를 했으나 차도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면 받게 되는 퇴직금 일백여만원을 어머니 치료비에 충당(充當)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 다니고, 좋다는 약을 구해서 정성껏 간병(看病)했으나 병은 회복되지 않았다.

남편은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고 있었는데 1983년 12월에 영천에 있는 모 한약방의 약을 구하러 가다가 얼음판에 넘어져 척추(脊椎)를 다치게 되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남편마저 자리에 눕게 되자 박여사(朴女史)는 눈앞이 캄캄했으나 백방으로 약을 구해서 정성껏 간병(看病)했으므로 남편의 병은 어느 정도 치료되었다.

그러나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아 육체적으로 막노동은 할 수 없게 되어 87년 10월부터 한 달에 18만원의 보수를 받고 아파트 수위직을 맡아 근무하게 되었다.

박여사(朴女史)가 지극한 정성으로 병구완(病救援)을 한 보람도 없이 89년 10월에 시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지만 6년 6개월 동안 한 번도 내색하지 않고 시어머니의 손발이 되어 온갖 어려운 시중을 든 박여사(朴女史)야말로 출중(出衆)한 효부(孝婦)라 아니할 수 없다.

이렇게 어렵고 힘든 살림살이를 하면서도 박여사(朴女史)는 아들 셋을 고등학교 교육(敎育)을 마칠 수 있도록 열심히 뒷바라지를 했으며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가난한 살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하여 월 18만원의 봉급을 받고 우방주택의 청소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러한 박여사(朴女史)의 효성(孝誠)에 주위에서 찬사를 보내지 않는 이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