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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1990년 4월 20일)
보화상(補化賞) 본상(本賞)
경북 칠곡군 지천면
효부(孝婦) 최순덕(崔順德) 41세
최순덕 여사는 경산군 자인면에서 2남 1녀 중 외동딸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병약한 탓으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도 못하고 어릴 때부터 남의 집 아기를 돌봐주면서 생계를 도왔다.
최여사는 어릴 때부터 천성이 유순하고 착하여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고 동기간에 우애가 있다고 이웃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어머니는 공장의 식당과 기숙사의 빨래를 하고 오빠들은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는 형편이라 최여사도 어려서부터 가사를 돌보지 않을 수 없었다.
1969년 20세 때에 7년 연상인 김판석씨와 중매결혼을 했다. 남편 김판석씨는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교를 마친 뒤 초가삼간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철도 노선반에서 침목을 나르는 일용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결혼 초부터 두 사람은 젊을 때에 맞벌이를 해서 저축하자고 언약하고 최여사는 12km나 떨어진 왜관의 음료수 제조공장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밤에는 시간당 200원 벌이의 부업을 가져와서 일하며 가계를 꾸려갔다.
그러던 중, 1970년에 이웃 마을에서 6.25 전쟁 때에 아들을 잃고 홀로 사시던 시외조모님(77세)께서 중풍으로 몸져 눕게 되었다. 최여사는 남편과 의논해서 시외조모님을 집으로 모셔다가 식사 시중과 대소변을 받아 내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6년 동안 병구완을 했으나 1976년 83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시자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루었다.
그러는 동안에 1971년에는 남편이 그간의 성실한 직장생활을 인정받아 신동역의 정규직원으로 특채되고 슬하에 자녀들도 3남매를 두게 되었다. 남편이 정식 철도공무원이 되고 가정 경제도 나아졌고 자녀들도 탈없이 잘 자라서 최여사는 즐겁고 희망찬 나날을 시외조모님의 병간호에 바칠 수가 있었다. 시외조모님이 돌아가시자 최여사는 6년 동안의 간병생활을 끝내고 한숨 돌리려고 하는데 1974년에 또 74세의 고령이신 시백부님이 슬하에 자식도 없이 홀로 객지에서 노환으로 거동이 어렵게 되었다. 최여사는 이번에도 남편과 의논해서 시백부님을 집으로 모셔오기로 했다.
시백부님을 집으로 모셔온 후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좋다는 약을 달여 드리고 극진히 병간호를 했으나 3년 후 77세로 세상을 떠나시자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냈다. 이렇듯 10년 동안이나 시외조모님과 시백부님의 병구완에 매달리다 보니 남편의 박봉만으로는 생계가 쪼들리게 되었다. 그래서 최여사는 다시 일터에 나가게 되었다. 막내 아들을 업고 삯모도 심고 벼베기 날품도 팔면서 아무리 고된 일이라도 참고 견디면서 억척같이 일을 했다. 그렇게 해서 근검절약으로 모은 돈으로 1982년에는 초가를 헐고 새마을 주택으로 개량하였고 논도 몇 마지기 사들여 자영하게 되었다. 이렇게 생활이 조금씩 늘어나자 최여사는 자기 몸이 지치고 괴로운 줄도 모르고 마냥 즐겁고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시외조모님과 시백부님의 병구완과 장례에 정성을 다한 효행과 굳은 의지와 끈기 있는 노력으로 집안 살림을 알뜰히 꾸려가는 내조의 공과 아이들을 올바르게 양육하는 장한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본 마을 노인회에서 1978년 5월 8일 어버이날에 최여사에게 효부상을 수여하였다. 그런데 1986년 8월에 집안 어른이라고는 혼자 남으신 시어머니께서 중풍에 걸려 반신불수가 되어 거동이 불능하여 자리에 눕게 되었다.
최여사는 잠시 숨을 돌리려 하면 또 불행이 닥쳐오니 참으로 어렵고 힘든 병간호를 또 해야만 하지만 조금도 불평하거나 내색하지 않고 자식된 도리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서 있는 힘을 다해서 온갖 시중을 정성껏 들었다. 식사 시중과 대소변이 처리 뿐만 아니라, 손발을 깨끗이 씻어 드리고, 주물러 드리고, 의복을 깨끗이 갈아 입히고, 이부자리의 세탁 등 모든 정성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나 4년 간의 투병 끝에 1990년 1월에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 동안에 절약해서 모은 돈 1백만으로 산 210평을 미리 사두고 수의도 장만해 두었다가 공동묘지에 모셔두었던 시아버지의 무덤을 이장해서 시어머니의 무덤과 쌍봉으로 초종장례를 무사히 마쳤다. 최여사의 이와 같은 행적이 널리 알려지자 1989년부터 그녀의 자녀가 다니는 신동중학교 어머니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맏딸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백화점에 직원으로 취직되어 두 동생의 학비를 보태고 있으며 자녀들도 성실하고 부모님께 효도하여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
과학의 발달에 따라 모든 것이 상품화하고 물질문명이 판을 치고 가치관이 전도되어 정신문화는 쇠퇴일로를 걷고 있는 오늘날의 젊은 주부들은 편리한 것만 추구하고 고되고 힘드는 일은 기피하며 사치와 허영에 눈이 어두워 과소비 풍조가 팽배하고 핵가족시대가 되어 자기만 내세우는 이기주의가 만연하여 전통적인 미풍양속은 자취를 감추고 있는데 이런 시대에 40대의 젊은 주부가 고유의 미덕을 지키고 있으니 그가 바로 최순덕 여사이다.
최여사는 비록 학교공부는 많이 하지 못했고 경제적으로 가난하여 온갖 여건을 헤쳐 나가는 고생을 하면서 살아왔지만 의지할 곳 없는 시외조모님과 시숙부님을 집으로 모셔다가 봉양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병간호를 했으며 돌아가신 뒤에는 예를 갖추어 장례를 지내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평소에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다가 병들었을 때 정성껏 병구완을 하고 천수를 누리게 했으며 사후에 안주할 묘소를 마련하여 시부모님이 저승에서 편안하게 지내시도록 배려한 그 효행은 전통윤리 사상이 꺼져가는 오늘날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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