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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순(辛正順) 여사(女史)는 1949년 12월에 임태환씨와 결혼했는데 당시의 풍속에 따라 신행 전 1년 동안 친정에서 지내고 있을 당시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남편은 군에 입대했고 그 해 7월에 전사하였다.
남편이 전사했다는 비보를 듣고 그 해 9월에 시댁으로 출가(出嫁)한 신여사(辛女史)는 19세의 꽃다운 나이로 남편 없는 시가(媤家)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동생과 더불어 가정을 꾸려가는 시집살이를 하게 되었다.
자식이 전사(戰死)했다는 소식을 들은 시어머니는 정신적 충격을 받아 건강(健康)이 갑자기 악화되어 노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신여사(辛女史)는 종중논(宗中畓)의 소작(小作)을 맡아 남자도 하기 어려운 농사일을 하면서 가난한 살림을 꾸려갔다,
1961년 시동생이 혼인하여 분가하고 시어머니 병환은 점점 짙어져서 사흘이 멀다고 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부득이 주거지를 경주시내로 옮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집을 시내로 옮긴 신여사(辛女史)는 전세방을 전전하면서 국가에서 지급하는 연금으로 가계를 꾸려가야 했다.
남편의 얼굴을 몇 번 보지도 못하고 사별한 청상(靑孀)이지만 신여사(辛女史)는 한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고 내색하지도 않으면서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지극한 정성으로 병간호(病看護)를 하였다.
그러다가 지금의 거주지인 황남에 3백만원으로 방 두칸의 전세를 얻어 시어머니를 모시고 연금으로 어렵게 살아가는데 1983년에 시동생이 사망하게 되자 그 충격으로 시어머니가 중풍(中風)에 걸려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어 거동할 수 없게 되자 신여사(辛女史)는 식사의 시중과 대소변을 받아 내는 등 어려운 병간호를 하게 되었다.
신여사(辛女史)가 지극한 정성으로 간병(看病)하는 것을 지켜 본 경주시 바르게 살기 운동협의회에서 1990년 3월에 효행상(孝行賞)을 수여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장한 일이다.
스물도 안 되는 꽃다운 나이에 신혼의 꿈도 이루어보지 못한 채 남편을 나라에 바치고 외로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온갖 고생을 참아가면서도 10년 가까이 시어머니의 병구완을 하며 40여년의 세월을 수절(守節)해 온 신여사(辛女史)야말로 찾아보기 어려운 효부(孝婦)이며 열부(烈婦)가 아닌가. 그의 앞날에 천록(天祿)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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