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본문

이옥모(李玉模) 여사(女史)는 1949년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접경지역인 문경 새재(鳥嶺) 바로 아래 산골 동네에 태어나 21세 때에 같은 마을에 사는 농부의 둘째 아들과 결혼했으나 결혼하고 1년만에 시숙이 병사(病死)하고 동서는 시어머니와 3남매를 두고 가출해 버리자 이여사(李女史)가 시어머니와 조카들을 보양(保養)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놓였으나 당시 재산이라고는 산골짜기의 밭 천평 정도였다.
그래서 이여사(李女史)는 남편과 함께 남의 논 소작(小作)과 품팔이, 산채(山菜) 채취 등 닥치는 대로 노동하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1981년에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태산같이 믿었던 남편이 사망하자 이여사(李女史)는 살아갈 일이 막막했으나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야 한다고 굳게 결심하고 불굴(不屈)의 의지로 만난(萬難)을 헤쳐나가면서 조카들을 훌륭하게 키워 사회의 역군으로 진출시키고 자신의 자녀들도 훌륭하게 양육하여 맏아들은 육군 중위로 군에 복무하고 있다.
그런데 남편이 사망하고 2년만에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몸져 눕게 되었다.
이여사(李女史)는 식사의 시중은 물론이고 대소변을 받아 내고, 목욕을 시켜 드리고, 새 옷을 갈아 입히고, 청소와 빨래를 하는 등 온갖 정성(精誠)을 다하여 8년 동안을 한결같이 병구완에 전념하고 있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본 주위의 사람들이 표창상신(表彰上申)을 하려고 했으나 자식이 병든 부모님을 모시고 돌보는 것은 당연한 도리를 하는 것 뿐이라며 극구 사양해 왔다.
남편이 죽자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가버리는 사람도 있는데 그 자식을 집으로 데려다가 친자식처럼 길러 준 이여사(李女史)는 꽃다운 나이 30대 초반에 남편과 사별하고 재혼(再婚)의 권유도 뿌리치고 10년을 수절(守節)하면서 시어머니의 중풍을 8년 동안이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극정성 병구완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내색하지 않을 뿐더러 겸허(謙虛)한 마음으로 인간의 도리를 했을 뿐이라고 하니 출중한 효부가 아닌가.
또 이여사(李女史)는 여자의 몸으로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 나가면서 자녀들을 훌륭하게 양육(養育)했으니 또한 장(壯)한 어머니가 아닌가.
날로 미풍양속이 쇠퇴해가는 오늘날 이여사(李女史)와 같은 젊은 주부의 효행(孝行)을 모두가 칭송을 하고 있다.
- 이전글제34회 효행상(孝行賞) 황병숙(黃丙淑) 25.06.17
- 다음글제34회 효행상(孝行賞) 신현자(申鉉子) 25.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