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김을분(金乙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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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1991년 4월 25일)
효행상(孝行賞)
경북 경주시 내남면
효부(孝婦) 김을분(金乙粉) 50세

김을분(金乙粉) 여사(女史)는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고 불구(不具)인 딸을 데리고 살면서 내 몸을 희생(犧牲)하여 시어머니와 정신박약인 딸의 고된 삶을 위해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또 열심히 살아가는 소문난 효부(孝婦)이다.

김여사(金女史)는 시집 올 때부터 자기소유의 땅이라고는 한 평도 없고 집도 없어 남의 문종집을 무료로 빌려 거주하면서 소작농을 얻어 농사를 짓고 슬하에 4남매를 두었는데 그 중 딸 정숙은 정신박약에다가 언어와 청각의 이중장애자로 김여사(金女史)는 30년 동안을 그 딸의 수족 노릇을 하면서 살아왔다.

지병으로 오래 고생하다가 지난 84년에 남편이 시어머니와 가족들을 두고 세상을 떠나자 김여사(金女史)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과 남은 삶에 대한 걱정에 얼마 동안 눈물로 세월을 보냈으나 남은 식구들을 생각해서라도 억척같이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가장(家長)으로서의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여자 혼자의 힘으로는 소작농사를 짓기가 어려워서 남의 집 삯일이나 품팔이를 하면서 생계(生計)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3년 전(88년)부터 시어머니(77세)께서 중풍으로 쓰러졌다.

김여사(金女史)는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대구로, 영천으로 용하다는 의원과 좋다는 약(藥)을 구해 시탕(侍湯)해 보았으나 백약이 무효이고 결국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어 거동이 불능하게 되었다.

김여사(金女史)는 날품팔이를 하지 않으면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었다.

병석에 누워 계시는 시어머니의 식사 시중과 대소변을 받아 내는 일이며 손발을 씻어 드리고 빨래를 하는 등 온갖 정성을 들여 병구완을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거나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고 묵묵히 견디어 냈다. 그 뿐인가 정신박약 환자(患者)인 딸의 시중도 들어야 하니 몸이 지칠대로 지쳤으나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꿋꿋하게 희망을 잃지 않고 살고 있다.

이렇듯 김여사(金女史)는 신혼 초부터 가난한 생활환경을 극복하면서 살아왔으나 남편의 사망으로 가세는 더욱 어려워졌고 정신박약 환자인 딸의 뒷바라지를 30년 동안이나 해 왔으나 3년 전부터 시어머니의 중풍 병간호(病看護)까지 해야 하게 되었다.

여자 혼자의 힘으로 이 모든 일을 감당해가고 있는 김여사(金女史)의 효행(孝行)을 모든 사람들이 칭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