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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웅(金後雄) 여사(女史)는 19세 때에 김용진씨와 결혼해서 일찍이 남편과 생이별(生離別)하고 헌신적(獻身的)으로 어려운 가정 환경을 극복하고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셔 온 효부이다.
결혼 당시 문중(門中)의 논 600평과 밭 500평으로는 조상 15위를 봉제사하기에 급급하여 김여사(金女史)는 끼니를 굶을 때도 있었지만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그러던 중 1950년 6.25 전쟁이 발발(勃發)하자 남편은 행방불명(行方不明)이 되고 지금까지 생사를 알 길이 없다.
남편이 행방불명 되자 생계는 점점 더 어려워져 김여사(金女史)는 낮엔 이웃집 농사일을 거드는 품팔이를 하고 밤에는 길쌈을 해서 푼푼이 모은 돈으로 전답을 사들여 지금은 3천평의 토지로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남편도 자식도 없이 40여년간을 수절(守節)하면서 현재는 9순(旬)의 시아버지를 모시고 생활하고 있는 김여사(金女史)는 오래 전부터 신경통을 앓고 있는 시아버지가 바깥 출입을 할 수 없게 되자 손발을 깨끗이 씻어 드리고, 의복을 깨끗이 갈아 입히고, 음식을 장만하여 이웃 노인들을 초청(招請)하여 대접하고, 시아버지의 말동무가 되도록 하는 한편, 좋은 약을 구해오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드리는 등 전심전력(全心全力)을 다하여 병구완을 해서 지금은 마당 출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종가집(宗宅)을 찾아오는 손님이나 일가들에게도 한결같이 다정하고 친절하며 김여사(金女史) 자신에게는 슬하에 자식이 없어도 종중의 자손들에게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효(孝)가 모든 행실의 근본이라는 것과 예의범절(禮儀凡節)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면서 예절교육에 힘쓰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년에 15위가 넘는 조상의 제사를 정성껏 받들어 모시고 있으면서도 불평하거나 내색하지 않으니 종친들도 종부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효부(孝婦)라고 칭송이 자자하다.
아무리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할지라도 꽃다운 나이 20대에 남편과 헤어지고 슬하에 혈육 한 점 없이 50년 가까운 세월을 수절(守節)하면서 찢어지도록 가난한 살림살이를 여자의 힘으로 일으켜 세우고 연로하신 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시고 일가 친척과 화목하게 지내며 문중일에도 솔선수범하고 후손들의 교훈에 힘써 오는 김여사(金女史)는 날로 쇠퇴해가는 전통윤리와 경로 효친사상을 일깨워 모든 사람에게 실천해 보인 산 교육자이며 한국의 어머니 상(像)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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