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정리남(鄭利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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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1992년 4월 24일)
열행상(烈行賞)
경북 울릉군 울릉읍
열부(烈婦) 정리남(鄭利男) 54세

정리남(鄭利男) 여사(女史)는 1958년 20세 때에 최성기씨와 결혼하여 살림은 넉넉하지 않았으나 슬하에 1남 4녀를 두고 행복(幸福)하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그런데 1976년 4월 남편의 불의(不意)의 사고로 사망했다.

태산같이 믿었던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자 정여사(鄭女史)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 눈앞이 캄캄하며 며칠 밤을 눈물로 지새웠다.

주위 사람들 가운데는 개가(改嫁)하라고 권유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것은 죽은 남편에 대한 도리가 아닐 뿐더러 5남매의 자녀교육(子女敎育)을 위해서도 그럴 수는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고 불굴(不屈)의 의지로 시련(試鍊)을 극복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8년 10월부터 행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눈보라 치는 추운 겨울이나 불볕이 내려 쪼이는 한여름의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날마다 새벽일찍 부두에 나가서 생선을 사서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이 마을 저 마을을 헤매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이러한 딱한 사정을 감안해서 울릉군에서 79년도 영세민 보호대상자로 선정되어 의료혜택(醫療惠澤)과 생계지원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행정지원(行政支援)으로 말미암아 삶의 의욕을 북돋우고 활력소(活力素)가 되었다.

정여사(鄭女史)는 억척같이 일을 하고 검소(儉素)한 생활을 하면서 한푼 두푼 푼푼이 모은 돈을 밑천으로 삼아 바다횟집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래서 83년부터는 영세민 보호대상에서 벗어나게 되고 그 후 10년 가까이 장사를 하여 이제는 주위의 불우한 이웃에게 온정(溫情)을 베풀 수 있을 만큼 생활이 넉넉해졌다.

정여사(鄭女史)는 그렇게 어려운 환경(環境) 속에서도 자녀들의 뒷바라지를 착실히 하여 장남과 막내딸은 대학에 다니고 나머지 딸들도 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직장에서 또는 가사를 돌보고 있으며 모두가 하나같이 착하고 성실하다.

만약에 정여사(鄭女史)가 열부의 정절(貞節)을 지키지 않고 재혼했거나 불굴의 정신과 헌신적(獻身的)인 노력이 없었다면 그 때 어린 자식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30대에 청상(靑孀)이 되어 평생을 수절(守節)하면서 혼자의 힘으로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도 5남매를 훌륭하게 교육시킨 정여사(鄭女史)의 열행(烈行)과 모성애(母性愛)는 동민(洞民)들로부터 많은 찬사(讚辭)를 받아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