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계지백(桂枝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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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1992년 4월 24일)
열행상(烈行賞)
경북 문경군 마성면
열부(烈婦) 계지백(桂枝百) 48세

계지백(桂枝百) 여사(女史)는 문경의 산간오지 마을에서 태어나 1964년 20세 때에 중매결혼(仲媒結婚)을 하였으나 중매쟁이의 속임수로 전처(前妻)의 딸이 한 명 있는 줄도 모르고 결혼했던 것이다.

계여사(桂女史)는 이혼하려고 몇 번이나 망설였으나 친정(親庭) 부모님의 만류도 참고 살아왔는데 1969년에 광산(鑛山)에 다니던 남편 황종철(黃鍾哲)씨가 낙반사고(落磐事故)로 부상을 입고 경북대학교 의과대학부속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우선 수입원이던 광산 노임이 없어져서 생활에 위협을 받게 되었다.

2년간 입원해 있는 동안 계여사(桂女史)는 날품팔이로 시어머니를 봉양(奉養)하고 가계를 근근이 이어가고 대구와 문경을 내왕 하면서 병간호(病看護)를 해야하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끝내 남편은 하반신 불수(下半身 不隨)의 불구자(不具者)가 되어 퇴원했고 남편이 퇴원 하자마자 시어머니가 신장염(腎臟炎)으로 몸져 눕게 되었다.

계여사(桂女史)는 시어머니와 남편의 방을 번갈아 가면서 대소변을 받아 내야 하고 품팔이도 해야 먹고 살 수가 있었다.

겨울에는 땔감도 직접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다가 2년 후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계여사(桂女史)는 애통(哀痛)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병원(病院)에 입원시키기는 커녕 약 한첩도 지어 드리지 못한 것이 한(恨)이 되었다.

계여사(桂女史)는 남편의 병간호(病看護)를 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품팔이를 해야 하는데 어린 아들을 업고 가서 논둑이나 밭둑에 두고 일 하려니까 여의치 않아 막걸리 주점(酒店)도 내어 보았으나 외상 때문에 잘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70리 밖의 점촌시장에서 생선을 도매로 사서 머리에 이고 다니면서 팔기도 하고 두부를 이고 다니면서 팔기도 했다.

장사를 마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면 하루 종일 누워 있던 남편은 마치 무슨 부정한 것이라도 한 것처럼 트집을 잡고 때리고 가구를 부수기도 하고 옷을 태우기도 했으나 계여사(桂女史)는 묵묵히 참고 견디면서 아들을 대학까지 공부시키고 지금은 대정광업소에서 탄부로 일하면서 남편의 병간호(病看護)에 전념하고 있다.

속아서 결혼했지마는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면서 자식을 훌륭하게 교육시키고 20여 년 동안 하반신 불수의 불구자(不具者)인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살아 온 계여사(桂女史)의 열행(烈行)이야말로 현모양처(賢母良妻)의 표본(標本)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