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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연(金宗連) 여사(女史)는 1964년 24세 때에 박용금씨와 결혼하였는데 시댁(媤宅)에는 재산(財産)이라고는 전혀 없고 시부모님과 시동생과 시누이가 살고 있었다.
시댁(媤宅)은 논밭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집도 없이 남의 문중(門中) 재실(齋室)에서 기거하면서 8명이나 되는 대가족(大家族)이 생계를 꾸려가야 하는데 시어머니는 관절염(關節炎)에다가 신장염(腎臟炎)까지 앓는 중환자(重患者)이고 남편은 허약체질이어서 노동능력이 없었다.
김여사(金女史)는 결혼 초부터 이런 가정의 주부로서 마을의 품삯일을 도맡아 하면서 자신은 굶을 때도 있으면서 식구들의 연명(延命)에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시름시름 앓다가 마침내 실어증(失語症)으로 말을 못하게 되었다. 여덟 식구의 끼니조차 힘드는 처지에 시어머니와 남편의 약값을 마련한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가 없어서 김여사(金女史)는 민간요법(民間療法)으로 좋다는 약초(藥草)를 구하기 위해서 산과 들을 헤매어 정성(精誠)껏 달여 드렸다.
이러는 동안에 시집온 지 3년 만에 시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시고 남편은 쉰 목소리이지만 아기가 말을 배울 때처럼 한마디씩 말을 하게 되었다.
이에 김여사(金女史)는 희망(希望)과 용기를 얻게 되어 무슨 일이든지 가리지 않고 피나는 노력을 해서 시동생과 시누이를 결혼시켜 분가시키고 남편에 대한 병구완(病救援)에 모든 정성을 다 바쳤다.
그렇게 정성들인 보람이 있어 남편의 건강(健康)이 차츰 회복(回復)되어 지금은 농사일을 거들게 되었다.
억척스럽게 노력해서 시집온지 8년만에 초가집도 한 채 마련하고 논도 1천 6백평을 장만하게 되었으며 지금은 초가를 기와집으로 개축(改築)하게 되었다.
그런데 86년부터 시아버지가 치매(노망)에 걸려 모시기가 힘들게 되었다.
하루에 식사를 다섯 번 여섯 번씩 드려도 밥 안 준다고 고함을 지르고 식구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나가라고 야단치기도 하고 인사불성(人事不省)일 경우가 많다.
김여사(金女史)는 치매에 좋은 처방이 있다면 어디든지 찾아가서 약을 구해다가 시탕(侍湯)하고 있으며 시아버지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온갖 정성(精誠)과 노력을 다하고 있다.
이와 같이 어려운 가정을 혼자의 힘으로 일으키고 남편의 건강(健康)을 회복시키고 시아버지께 극진히 효도(孝道)하는 김여사(金女史)의 열행을 동리(洞里) 사람들 모두가 칭송(稱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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