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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순이(具順伊) 여사(女史)는 1953년 4월 19세 때에 공직생활을 하는 성병옥씨와 결혼하였다.
남편 성병옥씨는 대구에서 직장을 가지고 내연(內緣)의 처 윤옥순과 동거생활(同居生活)을 하고 있었으나 구여사(具女史)와 결혼하고 혼인신고(婚姻申告)까지 하였다.
결혼하고 3~4개월은 남편이 일주일에 한번쯤 고향을 다녀갔으나 그 후로는 호적상(戶籍上)으로 부부(夫婦)이지 실제로는 내연의 처와 동거생활(同居生活)을 하고 있었다.
구여사(具女史)는 처음은 남편을 따라 대구에 가서 살 줄 알았는데 돌아가는 상황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랄 때에 배운 엄격한 가정교육(家庭敎育) 때문에 처음부터 불행하게 시작한 결혼을 한탄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시부모님을 극진히 모시고 어린 시동생과 막내 시누이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억척같이 농사일을 하였다.
남편이 동거하는 여자와의 사이에서 출생한 아이 셋을 구여사(具女史)의 호적(戶籍)에 등재할 때에는 눈앞이 캄캄했으나 10여년 후에 자기자신의 딸을 낳고 이어 아들을 낳게 되자 더욱 희망을 가지고 한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시부모님을 극진히 모시고 시동생과 시누이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녀의 양육(養育)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공직에서 정년퇴임(停年退任)한 남편이 계속 대구에서 생활하고 있다가 1988년에 중풍으로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어 거동이 불능하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한 평생 희생(犧牲)하고 살아온 구여사(具女史)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남편을 맞아 들여 온갖 어려운 병수발을 죽을 때까지 3년 동안 계속했던 것이다.
아무리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시대라 하더라도 결혼해서 혼인신고(婚姻申告)만 해 놓고 딴살림을 살면서 그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구여사(具女史)의 호적(戶籍)에 등재(登載)해 놓고 시골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시동생과 시누이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농사를 짓는 아내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중풍이 들어 돌보아 줄 사람이 없으니 고향으로 찾아온 처사가 너무 지나쳤으나 구여사(具女史)는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지극한 정성으로 간병(看病)했으니 이 얼마나 훌륭한 열녀(烈女)인가.
구여사(具女史)는 딸을 출가시켰고 아들도 장가 보내었다.
이제는 87세의 시아버지와 82세의 시어머니를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모시고 있다.
마을 사람 모두가 그녀의 효행(孝行)을 칭송(稱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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