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박중웅(朴重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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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1992년 4월 24일)
효행상(孝行賞)
경북 경산군 와촌면
효자(孝子) 박중웅(朴重雄) 56세

박중웅(朴重雄)씨는 가난한 농가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뒤를 농업(農業)에 종사하였는데 아버지의 병환(病患)으로 전답(田畓) 천 여평을 모두 병원의 치료비(治療費)로 날려 버리고 살기는 더욱 어려워졌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친구의 주선으로 직장에 취업(就業)하게 되었으나 워낙 박봉(薄俸)이라서 생계 유지가 되지 않았다.

박(朴)씨는 직장을 그만 두고 이것 저것 닥치는 대로 막노동을 해 보았으나 시골에서 일정한 일거리가 언제나 있는 것도 아니고 생활은 점점 쪼들리게 되었다,

박(朴)씨는 궁리 끝에 얼마의 돈을 빚내어서 조그마한 음식점을 차리게 되었다.

1961년 봄이었다. 

그런대로 장사는 잘 되었다.

그러나 6남매의 장남인 박(朴)씨가 혼자 벌어서는 대가족(大家族)의 생계(生計)를 겨우 꾸려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동생들의 뒷바라지와 결혼비용(結婚費用), 그리고 자녀들의 교육비(敎育費)에 충당(充當)하고 나니 겨우 살아가는데 바쁠 뿐 여유 돈이 없었다.

그럭저럭 지내다가 1984년 그러니까 8년 전에 어머니의 지병(持病)이 악화되어 여기 저기의 병원을 찾아 다녀도 병은 낫지 않고 진료비와 치료비만 들어가자 집안 살림은 점점 극빈하게 되었다.

살림살이가 점점 쪼들리자 박(朴)씨의 부인이 충격을 받아 고혈압(高血壓)으로 쓰러져 문밖 출입을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경영(經營)하는 음식점도 손님이 줄고 잘 되지 않았지만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그만 둘 수도 없었다.

박(朴)씨는 73세의 어머니와 부인의 병간호(病看護)를 하면서 혼자서 계속 영업(營業)을 했으나 환자가 두 사람이나 있는 집에 손님이 올 리가 없었다. 

손님이 없기에 문을 닫을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막상 음식점이 문을 닫고 나니 막연했지만 친구의 소개로 영천에 있는 어느 음식점에 취직하게 되었다.

박(朴)씨는 새벽에 일어나서 어머니의 대소변 처리를 하고 세수를 시켜 드리고 부인의 시중을 들어 주고 아침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고 난 뒤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돌아와서는 빨래하고 모든 뒷마무리를 한다.

박(朴)씨의 하루는 잠시도 쉴 틈이 없는 일과이지만 짜증을 내거나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한결 같다.

이렇게 꿋꿋하게 살아가는 박(朴)씨를 보고 마을 사람들 모두가 효자(孝子)라고 칭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