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본문

제35회(1992년 4월 24일)
보화상(補化賞) 본상(本賞)
경북 고령군 다산면
효자(孝子) 기관연(奇觀衍) 49세
전통적인 윤리도덕을 숭상하고 누대로 효행과 열행의 전통을 가진 명문의 3남 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기관연씨는 조선조 때의 성리학자로 유명하신 대사간을 지낸 고봉 기대승의 11대손으로 출천대효라는 명성이 높은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팔순이 넘은 연로하신 어머니를 지성으로 효양하면서 8식구의 가장으로서 언제나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나가고 있다.
기관연씨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으나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하면서 주경야독으로 부지런히 독학하였다. 어릴 때부터 천성이 대쪽같이 곧고 효성이 남달리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 또한 유달리 돈독하여 주민들의 칭송을 받아왔다.
재산이라고는 논 서마지기 뿐이고 거기에 소작농 몇 마지기로 생계를 유지해 오던 중, 가난에 한이 맺힌 형은 직장을 구하러 무작정 서울로 가고 집안의 살림살이는 모두 기관연씨가 짊어지게 되었다. 한 집안의 가장이 되어 모든 책임을 지게 된 기씨는 조부모님의 봉제사와 부모님의 봉양, 그리고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서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내면서 분골쇄신 일을 해야만 했다.
세상에 허다한 슬픔이 있겠지마는 가난하여 굶주리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을 것이다.
굶지 않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닥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기씨는 그러면서도 언제나 웃는 얼굴로 나갈 때에는 꼭 향방을 알리고 돌아와서는 아뢰는 출필고 반필면을 지키고 부모님 옆에 앉아서 세상사 돌아가는 얘기를 들려 드리고 부모님의 마음과 귀를 즐겁게 해 드리면서 타고나 효심으로 효도하고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갔다.
불행은 언제 어떻게 닥치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평화스럽던 가정에 불행이 닥쳐 왔다. 아버지가 중풍을 동반한 위암에 걸린 것이다. 기관연씨는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동분서주 좋다는 약과 의원을 찾아 다니면서 약을 구해다가 시탕하고 식사의 조절과 대소변을 받아 내고 목욕을 깨끗히 해 드리고 방안 청소와 새 옷으로 갈아 입히는 등 불철주야 병수발을 들면서 온갖 정성을 다 바쳤다. 그러나 지극한 효성과 백약의 효험도 죽음 앞에는 허무했다. 3년 동안 투병 끝에 1968년 향년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당시 기씨는 24세의 총각 상제로서 애통함을 금할 수가 없어 아침 저녁으로 조석전곡하고 삼년상의 예를 갖추어 치루었으니 이웃 주민들이 모두 감탄하여 효자라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
3년 상을 지낸 후 그의 효성이 지극하다는 것을 하늘이 알았는지 집안 형편이 차츰 여유가 생기게 되고 1972년에는 동네 사람들이 그를 이장으로 추대하게 되었다.
이장이 된 기관연씨는 때마침 새마을 사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라 새마을 환경 개선사업, 도로포장사업, 주택개량사업, 경로사상 고취사업 등 주민의 복지사회 건설사업에 열심히 일을 했다. 그때 마을의 중앙로 공사가 어려웠는데 기씨의 주장으로 그 공사를 완공하였다. 당시에는 원망도 많이 받았으나 오늘날에는 칭찬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그의 공적이 인정되자 주민들의 칭송은 효자라는 소문 못지 않게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기관연씨는 천성이 어질고 착한 데다가 인품이 후덕하여 어진 규수를 만나 혼인하고 근검 절약해서 유류업을 시작해서 지금은 생활에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그렇게 가난할 때에도 지극한 정성으로 부모님에게 효도해 온 기관연씨는 이제 생활에 여유가 조금 생겼으니 홀로 계시는 연로하신 어머니의 여생을 즐겁게 해 드리기 위해서 평소에 좋아하시고 즐기시는 음식을 마련하여 맛있게 드시도록 하고 자주 목욕을 시켜드리고, 깨끗하고 고운 옷으로 갈아 입히고 하나에서 열까지 어머니에게 여쭙고 의논해서 일을 처리하고 마을의 노인들을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함께 소일하게 하여 무료함을 달래고 즐겁게 지내시도록 온갖 정성을 다해 효도하고 있다.
지금은 출향했던 형이 생활이 좋아져서 제사를 모시고 가겠다 하고 어머니도 자기가 모시겠다고 하지만 어머니와 가족들이 의논한 끝에 어머니는 지금 이대로 기관연씨가 시봉하고 제사는 형이 모시고 가서 지내기로 했다. 그래서 제사 때마다 생전에 즐기시던 음식을 제수로 마련하여 서울로 가서 봉제하고 있다.
슬하에 1남 4녀가 있는데 왕대밭에 왕대 난다고 아버지가 지극한 정성으로 할머니를 섬기는 것을 늘 눈으로 보고 자라는 자녀들도 외출할 때에는 고하고 돌아와서는 반드시 아뢰며 할머니의 손발이 되어 심부름도 잘 해 준다. 이것을 지켜보는 마을 사람은 모두 효자 집안은 다르다고 칭찬한다.
원래 동양 윤리는 효가 백행의 근본이라고 했는데 서양의 물질문명이 밀려오고부터는 산업이 발달하게 되어 물질만능 시대가 되었다. 산업의 발달은 물질을 고급화·사치화하고 편리한 것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물결을 타고 사람들은 도시로 모여들고 힘드는 농사일은 기피하고 농촌을 떠나 핵가족을 이루게 되었다. 그래서 부모님을 모시는 경로 효친 사상도 날로 쇠퇴해가고 있다.
이러한 세상에서 기관연씨는 명문가의 후손답게 어려운 역경을 헤쳐가면서 아버지의 병간호를 지성으로 했으며 사후에 3년 상을 정중히 치루었고 어머니(85세)의 여생을 편안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온갖 정성을 다하고 형제간에 우애 또한 돈독하니 만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 다음글제35회 효행상(孝行賞) 김효임(金孝任) 25.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