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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옥(朴龍玉) 여인(女人)은 착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금릉군 지례면에 있는 성당에서 영세(領洗)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던 중, 1974년에 소아마비를 앓고 두 다리를 못쓰게 된 불구자로 장애자(障碍者) 1급 1호의 판정(判定)을 받은 문재원씨를 만나 친정부모님의 완강한 반대와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도 아랑곳 하지 않고 1977년 3월, 22세 때에 결혼하였다.
박여인(朴女人)이 문재원씨와 결혼한 것은 비록 몸은 불구자이지만 마음은 착하고 어질기 때문이었다.
남들은 받기 위해서 결혼하지만 박여인(朴女人)은 사랑을 주기 위해서 스스로 형극(荊棘)의 길을 선택하여 결혼한 것이었다.
시가(媤家)에는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집에 시어머니가 계시었다.
남편은 불구자이기 때문에 노동을 할 수가 없고 박여사(朴女史)는 남의 소작을 하면서 생계(生計)를 꾸려 나갔다.
그런데 남편은 평소에 은행문턱이 높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농민들에게 보다 쉽게 자금 혜택을 줄 수 있는 신용조합을 창립(創立)하겠다는 생각으로 동분서주하고 있었는데 박여사(朴女史)은 비록 장애자의 몸이지만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북돋아 주어 결국 신용조합을 창립하고 여러 사람들의 추천으로 신용조합이사장의 직책을 맡게 되었다.
박여사(朴女史)은 장애자라도 노력하면 사회에 봉사할 수 있다는 신념(信念)과 기쁨으로 고된 농사일도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하고 있었는데 1983년 봄에 시어머니가 골수암으로 쓰러졌다.
병원에 입원해야만 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죽을 날짜만 기다리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박여사(朴女史)은 신음하는 환자(患者)옆에서 식사 시중을 들고 대소변을 받아 내고 손발을 주물러 드리고, 목욕을 시키고, 새 옷으로 갈아 입히는 등 병간호(病看護)를 하면서 극진히 모시고 정성껏 기도를 올렸으나 1년여의 투병(鬪病) 끝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이번에는 2년 전부터 남편이 소아마비에 다른 병이 합병(合倂)하여 자리에 눕게 되었다.
박여사(朴女史)은 남편의 병간호를 정성껏 하면서 혼자의 힘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2남 1녀를 양육하고 있다.
스스로 장애자(障碍者)를 선택하여 선택하여 모든 고난을 도맡아 짊어지고 사랑을 실천하는 박여사(朴女史)의 열행(烈行)이야 말로 모든 젊은 여성들이 본(本)받을 일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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