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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목(李聖睦) 여사(女史)는 대구원화여고를 졸업하고 28세 때에 김봉석씨와 결혼하였다.
경혼 당시 시가(媤家)는 시아버지를 모시고 여섯식구가 단칸방에서 생활하는 극빈(極貧)한 가정이었다.
남편은 제품공장(製品工場)에 다녔으나 한 달에 15일 밖에 일하지 못하는 공장이어서 여섯식구가 생활하기에 너무나 가난했다.
그래서 이여사(李女史)는 결혼 초부터 여기저기 일거리를 찾아 닥치는 대로 일을 해 생활에 보태고 열심히 살아갔다.
이렇게 열심히 일한 대가로 조그마한 집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구(不具)의 몸으로 실의에 빠져있는 시동생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어 자립(自立)의 길을 열어주어 지금은 알차게 살아가고 있다.
집을 마련하고부터는 더욱 근검절약(勤儉節約)해서 생계가 차츰 좋아졌으며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마을의 부녀회장이 되어 불우한 노인들에게 경로(敬老)잔치를 열어주는 한편, 외로운 노인을 집에 모셔다가 식사 대접을 하는 등 경로정신을 실천하여 다른 사람들의 모범(模範)이 되고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 이여사(李女史)의 가정에 뜻밖의 불행이 닥쳐왔다.
1986년에 남편이 고통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이여사(李女史)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눈앞이 캄캄하였다.
22시간이라는 긴 수술 끝에 겨우 목숨을 건지기는 했지만 척추신경(脊椎神經)이 마비되어 하반신을 못쓰게 되는 불구자가 되고 말았다.
남편은 아내의 도움 없이는 거동할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여사(李女史)는 낙망하거나 좌절(挫折)하지 않고 남편의 손발이 되어 성심성의 모든 정성을 바쳐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열심히 일을 했다.
이것을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 눈시울을 적시고 이구동성으로 열부(烈婦)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이여사(李女史)는 겨우 마련한 집도 남편의 병원비 때문에 날려 버리고 다시 셋방살이를 하면서도 원망하거나 내색하지 않고 남편의 병간호(病看護)에 전력을 다하고 있으면서도 3남매를 모두 훌륭하게 교육시켜 사회인으로 진출시켰고 시동생의 뒷바라지를 하여 분가시켰으며 이웃의 불우한 노인을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여 힘 닿는데까지 도우고 있으니 경로효친(敬老孝親)사상이 무너져가는 오늘날 출중(出衆)한 열부(烈婦)이고 장(壯)한 어머니라고 높이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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