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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교(李弼敎) 여사(女史)는 천성이 유순하여 비록 학교에서 신학문(新學問)을 배우지 못했지만 엄격한 가정에서 현모양처(賢母良妻)의 부덕(婦德)을 닦아 송씨(宋氏) 집안에 출가하여 슬하에 1남을 두고 화목하게 살았는데 1950년 6.25 전쟁(動亂)이 발발하자 남편이 행방불명이 되고 지금까지 생사를 모르고 있다.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홀로된 이여사(李女史)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한 가정의 가장(家長)이 되어 어린 자식을 기르는데 어려움도 많고 고생도 많이 했으나 꿋꿋하게 살아왔다.
주위에서 재혼하라는 권유도 많았지마는 단호히 거절하고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면서 살아왔다.
이여사(李女史)의 시어머니도 28세 때에 남편과 사별(死別)하고 외아들을 기르면서 평생 동안 수절하신 분이라 무척 외롭고 한(恨)이 많은 분이다.
이러한 시어머니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헤아릴 줄 아는 이여사(李女史)는 지극한 정성으로 시어머니를 봉양하고 있다.
이여사(李女史)는 아침 저녁으로 시어머니께 문안 드리고 먼 곳에 가든지 가까운 이웃에 가든지 외출 할 때에는 반드시 고하고 돌아와서는 아뢰며 농사를 지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농사철에는 일하러 나가고 나면 홀로 계시는 시어머니가 무료하고 외로울까봐 이웃 노인들을 초청(招請)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시어머니와 함께 이야기 하면서 소일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그리고 장날에는 멀리 장에 가서 시어머니가 평소에 즐기시는 음식을 사다가 정성껏 장만해서 드리고 항상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혀 드리고 있다.
또 농한기(農閑期)에는 옆에 앉아서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세상 이야기를 들려 드리는 등 시어머니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고 어디가 조금이라도 불편하시면 지체(遲滯)하지 않고 약을 구해 드린다.
농토가 얼마 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지마는 이여사(李女史)는 외아들을 대학까지 보내어 현재는 서울에 있는 연금관리공단(年金管理工團)에서 근무하는 훌륭한 사회인으로 육성(育成)했다.
이와 같이 이여사(李女史)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헤어지고 지금까지 68세(실제 연령은 73세)까지 수절(守節)하면서 연로하신 시어머니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고 여자의 힘으로 자식을 훌륭하게 교육시켰으니 마을 사람들이 모두 효부(孝婦)이자 열부(烈婦)라고 일을 모아 칭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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