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정보
본문

신수순(申季順) 여사(女史)는 가난한 농가의 1남 3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나 1958년 22세 때에 이영호씨와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근근이 생계를 꾸려오던 중, 동서와 시숙(媤叔)의 연이은 사망으로 졸지에 고아가 된 조카 4명의 양육과 시부모님을 봉양(奉養)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신여사(申女史)는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는데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고 조카 4명과 모두 13명의 대가족(大家族)을 거느리고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식구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하기 때문에 10리 밖에 있는 친정(親庭) 나들이는 커녕 불철주야 몸이 부서지도록 일을 해야만 했다.
말할 수 없는 고달픈 나날이었다.
그러던 중, 1981년에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년 후인 83년 겨울에 시어머니가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져 자리에 눕게 되었다.
시어머니가 반신불수가 되어 거동을 할 수 없게 되자 신여사(申女史)는 중풍에 좋다는 약을 구해다가 달여 드리는 한편, 식사의 시중을 들고, 대소변을 받아 내고, 옷을 갈아 입히고, 세수를 시켜드리고, 머리를 빗겨 드리고, 1주일에 몇 번씩 목욕을 시켜 드리고, 빨래를 해야 하는 등 한치의 소홀함도 없이 병간호(病看護)를 하는 한편, 시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음식을 만들어 드리고 농사일도 거들어야 하고 자녀들과 조카들의 뒷바라지도 해야 했다.
이러한 와중(渦中)에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1984년에 남편이 교통사고(交通事故)로 병원(病院)에 입원하게 되었다.
이렇게 한꺼번에 닥친 불행 앞에 신여사(申女史)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형편이었다.
낮에는 시어머니의 병간호를 해야 하고 밤에는 남편의 간병(看病)을 위해서 100리 길을 내왕해야만 했다.
신여사(申女史)의 지극한 정성(精誠)으로 1년 후에 남편이 퇴원(退院)하기는 했으나 거동이 불편해서 농사일을 할 수가 없게 되자 신여사(申女史) 혼자서 모든 일을 감당 해야 했고 이것을 지켜 본 자녀들과 조카들도 열심히 공부하고 지금은 모두 성장하여 부모님께 효도(孝道)하고 사회의 일꾼으로 맡은 바 일에 충실(充實)하고 있어 20여호가 살고 있는 이 마을에서는 하늘에서 내려 보낸 천사라고 정신적(精神的) 지주로 삼고 있다.
신여사(申女史)는 오늘도 82세의 시어머니 최경순 여사의 병간호를 지극한 정성으로 하고 있는 출중(出衆)한 효부(孝婦)로서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 이전글제36회 효행상(孝行賞) 홍성희(洪成熙) 25.06.19
- 다음글제36회 효행상(孝行賞) 정순열(鄭順烈) 25.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