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김중순(金重順)

페이지 정보

본문

제36회(1993년 4월 23일)
효행상(孝行賞)
경북 영주시 조암동
효부(孝婦) 김중순(金重順) 41세

김중순(金重順) 여사(女史)는 1977년 26세 때에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아마비로 거동이 불편한 장동형씨를 평생의 반려자로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 형제를 두고 시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다.

김여사(金女史)가 결혼하여 가정사정을 살펴보니 시아버지는 경찰관으로 영주경찰서에 근무하던 당시, 1946년 10월 1일 대구 폭등(暴騰) 사건 때 출동해서 폭도들의 총탄에 맞아 순직(殉職)했고, 시어머니는 그 후 40수년간을 유복자로 태어난 불구의 아들 하나를 데리고 고생하면서 살아오신 분으로 연로하여 노동력이 없고 남편 또한 불구의 몸이라 노동력이 없었다.

김여사(金女史)는 갓 시집 온 새댁이지만 이웃집의 날품팔이를 하고 땔감에 사용될 나무를 하는 등 남자들도 힘드는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아갔다.

마을 사람들은 젊은 새댁이 그렇게 고생해가면서 얼마나 버틸 수가 있겠는가 걱정 반 비웃음 반으로 숙덕거렸으나 아랑곳 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갔다.

김여사(金女史)의 이러한 각오와 노력을 가상히 여겨 마을 어른 한 분이 자금(資金)을 빌려 주어 소와 돼지 몇 마리를 길러 보았으나 1년이 채 못되어서 원인 모를 병으로 죽어가서 도리어 손해를 보았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시어머니가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 치료했으나 차도가 없어 대구 동산의료원에서 진찰을 받아 보았더니 척추(脊椎)요척증으로 수술을 받았으나 움직일 수가 없어 대소변을 받아 내어야 했다.

그 후 극진한 간호에 힘입어 시어머니는 휠체어를 타고 병실 밖으로 출입하게 되었으나 6개월 후에 2차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일단 고향집으로 돌아 왔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시어머니는 여전히 문 밖 출입을 못 하시고 대소변을 받아 내어야만 했다.

김여사(金女史)는 품팔이와 행상을 해가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병간호(病看護)를 했다.

그러한 덕분으로 시어머니는 목발에 의지해서 한 두 걸음씩 문밖 출입을 하게 되었다.

이것을 지켜 본 마을 사람들은 김여사(金女史)의 지극한 효성(孝誠) 덕분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다.

김여사(金女史)는 시어머니의 병을 완치(完治)하는 것이 소원이기 때문에 다시 대구동산의료원에 입원시켜 하루 빨리 시어머니의 병환이 완쾌 되기를 바라며 정성(精誠)을 다하여 간병(看病)하고 있으니 현대여성으로는 보기 드문 효부(孝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