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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순(金玉順) 여사(女史)는 1971년 18세 때에 김영식(金英植)씨와 결혼했는데 남편은 강원도 삼척 철암에 있는 사북탄광의 광부(鑛夫)로 일하며 신혼생활을 단칸 셋방에서 시작했는데 열악한 근무환경으로 77년 10월에 탄광생활을 청산(淸算)하고 고향인 안동 송천동으로 이사했다.
탄광생활은 언제 사고가 발생할는지 모르는 위험성(危險性)을 항상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곳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가난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고향에는 시숙(媤叔)이 두 분 살고 계셨으나 맏시숙은 부산으로 이사를 갔고, 둘째 시숙은 7세의 조카와 5세의 질녀(姪女)를 남겨놓고 동서(同壻)가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김여사(金女史)가 시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조카들의 양육(養育)까지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남편 김영식씨는 전기공사장에서 하루도 쉬지 않고 막노동을 했으나 일곱식구가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형편이었다.
그래서 김여사(金女史)는 닥치는 대로 날품팔이를 하면서 시어머니의 봉양(奉養)과 자녀들 그리고 조카들의 양육에 정성을 쏟고 있었는데 1983년 7월에 시어머니께서 갑자기 중풍(中風)으로 쓰러졌다.
김여사(金女史)는 반신불수가 되어 거동이 불능한 시어머니의 병간호(病看護)를 지극한 정성으로 하였다.
식사의 시중과 대소변을 받아 내는 일과 손발을 씻어 드리고, 더럽혀진 옷을 갈아 입히고, 이부자리의 세탁 등 10년 동안을 한결같이 짜증을 내거나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모든 정성(精誠)을 다 바치고 있다.
안동(安東)은 거유명현(巨有名賢)이 배출된 고장이고 특히 송천동에는 향교, 서원, 종가, 제사(祭祀), 서당 등이 즐비하여 선비의 고장으로 주민들의 언행이 단정하고 풍습이 고전스럽고 인심이 순후하며 미풍양속(美風良俗)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다.
이런 마을에서 이웃 주민들이 모두 김여사(金女史)의 일상생활을 지켜보고 숙모가 어린 조카 남매를 친자식 이상으로 기르고 시어머니의 병간호를 지극정성으로 하여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고 있으니 출중(出衆)한 효부(孝婦)라고 칭송이 자자하다.
경로효친(敬老孝親) 사상이 날로 쇠퇴(衰退)해가는 오늘날 김여사(金女史)는 막노동과 날품팔이를 해 가면서 조카 남매를 고등학교까지 공부시켰고 중풍으로 누워 계시는 시어머니의 병구완을 10년 동안 한결같이 지극정성으로 하고 있으니 극구(極口)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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