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정승준((鄭承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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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1993년 4월 23일)
보화상(補化賞) 본상(本賞)
경북 문경군
효자(孝子) 정승준((鄭承俊) 64세

정승준씨는 문경읍 갈평리에서 태어나 1968년에 이곳 견탄 3리로 이주해 온 분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는 못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주경야독으로 글을 익혔다. 정효자는 천성이 순박하고 후덕하며 부모님께 효성이 지극할 뿐더러 부부간에도 금슬이 좋아 슬하에 5남매를 두었으나 가정형편은 극빈하여 밭 250평이 전재산이었다.

정승준씨는 연로하신 부모님을 봉양하고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기 때문에 농번기에는 남의 집 날품팔이를 하고 농한기에는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성실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불행은 언제 어떻게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인명도 마찬가지다. 인명은 재천이다. 나이 순서대로 죽는 것도 아니다. 1973년 이렇게 성실하고 화목한 가정에 불행이 닥쳐왔다. 

정씨의 부인이 사망한 것이다. 중년의 나이에, 찢어지도록 가난한 데다가 연세가 많으신 부모님을 모시고 어린 자식들이 다섯이나 딸려 있으니 아무도 시집 올 사람도 없고 그래서 재혼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어려운 일이 많지만 이렇게 난감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정씨는 막노동을 하면서 부인이 하던 부엌 일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농사 일은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배어 왔지만 밥 짓고 빨래하는 일도 몸에 익혀 가면서 10년을 살아왔는데 1982년에 설상가상으로 노모께서 중풍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정승준씨는 자식들은 비록 헐벗고 굶주리는 한이 있더라도 어머니의 병은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가서 좋다는 약을 구해다가 달여 드리고 온 산과 들을 헤매면서 민간요법으로 좋다는 약초를 캐어다가 시탕하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간병했으나 백약이 무효로 88년에 운명하시니 애통함을 금하지 못하여 예를 갖추어 초종장례를 치르고 조석전곡하였는데 마을 사람들 모두가 효자라고 칭송이 자자했다. 

현대의술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난치병이나 불치병은 고칠 수 없고 신학문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경제적으로 뒷받침해 줄 능력이 없으면 성취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혈안이고 소위 일류학교에 가기 위해서 아우성 치고 있다.

정승준씨는 이러한 와중에서 아이들 교육 같은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도시로 상경해서 저마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정씨는 아버지로서 그들의 가슴에 평생 배우지 못했다는 한을 맺히게 한 것이 죄스럽고 슬펐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90세의 늙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두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 노모가 돌아가신 뒤 5년 동안 부자간에 두 홀애비가 처량하게 살아왔다.

속담에 악처가 효자보다 낫다고 하는데 한 집안의 주부가 얼마나 많은 역할과 영향을 끼치는가를 절실히 깨달았고 이웃에 사는 노부부가 종종 싸우면서도 백년을 해로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눈물이 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 동안 연로하신 아버지를 모시는데에 하루 세끼의 식사 시중을 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의복을 갈아 입히고 행여나 몸이 불편한 데가 없는가 일거수일투족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혹시 몸이 불편하시면 병원으로 모시고 가든지 약을 구해 와야 하기 때문이다.

연로하신 어른을 모시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90노인은 하루가 다르게 체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웃는 얼굴로 마을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일들을 소상히 알려드리고 언제나 아버지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정승준씨는 아버지와 두 사람이 살고 있지만 남의 집 날품을 팔아야 한다. 그래서 그런 날에는 반드시 아무게 집에 무슨 일로 간다고 알리고 돌아와서는 하루에 있었던 일을 소상하게 아뢴다. 또 아버지의 생신 날에는 조촐한 상을 차려놓고 이웃의 노인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아버지와 함께 이야기 하면서 즐겁게 노시도록 하고 있다. 

정승준씨의 이와 같은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출중한 효자라고 칭찬하면 도리어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편안하게 모시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한다.

서구의 물질문명이 밀려오자 우리나라 고유의 정신문화인 윤리도덕은 땅에 떨어지고 따라서 쇠퇴해 가는 오늘날 세상에서 정승준씨는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서 학교교육도 받지 못하고 한 평생 가난과 싸우면서 성실 근면하게 살아왔으며 중년의 나이에 상처하고 재혼할 곳이 없어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부엌 일까지 맡아 어렵게 살아왔으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시게 되자 아이들 교육도 제대로 시키지 못했고 그래서 아이들은 저마다 살 길을 찾아서 떠나 버리고 이제는 정승준씨 자신의 나이도 64세이고 더욱이나 홀아비의 몸으로 90노령의 아버지를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면서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있으니 정승준씨를 어찌 하늘이 내리신 효자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씨의 효행은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 된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