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정미화(鄭美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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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1994년 4월 21일)
열행상(烈行賞)
대구직할시 서구 비산5동
열부(烈婦) 정미화(鄭美花) 33세

정미화(鄭美花) 여인(女人)은 1980년 19세 때에 송옥순(宋玉淳)씨와 결혼하여 시어머니를 모시고 단란한 가정(家庭)을 이루고 살았는데 불의의 사고로 남편이 거동(擧動)이 불능하게 되자 남편의 손발이 되어 헌신적으로 간병(看病)하고 있다.

정여인(鄭女人)의 남편은 책상, 걸상, 칠판 등의 제조업(製造業)을 하고 있었는데 1987년 10월에 고향인 칠곡군 지천면에 갔을 때 이웃집의 노인이 감을 따 달라기에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나뭇가지가 부러져 땅에 떨어져서 인근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대구 동산의료원에 1년 동안 입원치료(入院治療)를 받았으나 척추(脊椎)를 크게 다쳐 거동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정여인(鄭女人)은 척추를 다쳐서 거동이 불능한 남편의 대소변을 받아 내는 등 온갖 정성(精誠)을 다하여 병간호(病看護)를 하고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92년 11월에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정여인(鄭女人)은 어쩔 줄 몰랐다.

남편의 병수발도 힘들어 지쳤는데 시어머니까지 병상에 누웠으니 두 사람의 병구완(病救援)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정여인(鄭女人)은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동분서주(東奔西走) 좋다는 약을 구해다가 정성(精誠)껏 달여 드리고,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목욕을 시켜 드리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했더니 시어머니의 병환(病患)은 차츰 차도가 있어 건강(健康)이 많이 회복되었으나 남편의 병세는 더욱 악화해서 안면마비증(와사중)과 발작증세까지 합병(合倂)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여인(鄭女人)은 희망(希望)을 잃지 않고 오직 낫는다는 일념(一念)으로 병간호(病看護)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책걸상 제조공장도 문을 닫고 남편의 치료비와 약값 등으로 가세가 기울어져 주택임대료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시어머니의 약값과 아이들의 학비 등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가정부업(家庭副業)으로 밤깎이 등을 하면서 병간호에 전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정여인(鄭女人)은 7년 동안이나 거동불능인 남편의 대소변을 받아 내고 온갖 정성과 노력을 바치고 있으면서도 얼굴을 찡그리거나 내색하지 않고 지극한 정성으로 간병(看病)하는 것을 보고 이웃 주민들이 열부(烈婦)라고 칭송하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따름이라고 공치사(功致辭)하지 않는다.

여성상위시대라 해서 남편을 하늘같이 떠 받들던 시대는 아니지만 정여인(鄭女人)의 열행(烈行)은 오늘날 모든 젊은 여성(女性)들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