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유규하(柳桂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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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1994년 4월 21일)
열행상(烈行賞)
경북 영풍군 장수면
열부(烈婦) 유규하(柳桂夏) 49세

유규하(柳桂夏) 여사(女史)는 1964년 19세 때에 박건양(朴建陽)씨와 결혼하여 시어머니를 모시고 전처의 딸을 기르면서 남의 농토를 소작(小作)하고 살았는데 결혼하고 3개월 만에 남편이 군에 입대(入隊)하게 되었다.

남편이 군에 입대하자 유여사(柳女史)가 남편 대신에 농사를 지어 가을에 수확(收穫)했으나 남편이 진 빚을 갚고 나니 남는 것이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소작(小作)하던 농토도 내어 달라해서 살 길이 더욱 막막하였다.

유여사(柳女史)는 지게를 지고 먼 산에 가서 땔나무를 해 오는 등 살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했으나 당장에 먹을 양식이 없었다,

궁리 끝에 약간의 빚을 내어 30리밖의 영주장에 가서 건어물과 실, 바늘 등을 구입해서 행상을 시작하여 3년 동안 피나는 노력으로 가계를 꾸려가면서 시어머니를 봉양(奉養)하였다.

유여사(柳女史)는 남편이 제대하자 지금 살고 있는 화기리로 정착(定着)해서 남의 농토를 소작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던 중,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눈을 다치게 되어 병원에서 여러 번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실명(失明)하고 말았다.

유여사(柳女史)는 그 동안 알뜰히 모았던 돈도 남편의 병원비로 탕진(蕩盡)해 버리고 다시 살 길이 막막해졌다.

남편은 눈먼 장님이 되어 노동을 할 수가 없고 하는 수 없이 밤에 두부를 만들고 묵을 쑤어 낮에는 어린 자식을 등에 업고 이 마을 저 마을 행상을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업고 다니던 아이가 영양실조(營養失調)로 사망하였다.

아이가 사망하자 유여사(柳女史)는 행상을 그만두고 남의 집 날품팔이를 하면서 봄가을에 누에를 쳤다.

그때 면사무소에서 밀가루를 보내어 주어 보탬이 되었다.

1974년에 시어머니께서 중풍(中風)으로 쓰러져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어 거동이 불능하게 되자 유여사(柳女史)는 식사 시중은 물론이고 대소변을 받아 내고, 목욕을 시키고, 새 옷으로 갈아 입히고, 빨래를 하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하여 간병(看病)했으나 1982년에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남편은 눈이 보이지 않아도 여러 가지 일을 도와 주었고 유여사(柳女史)는 10년 전부터 소작농(小作農)을 경작(耕作)하여 그 동안의 빚을 갚고 92년에는 가옥을 개축(改築)하고 3녀를 출가시켰으며 94년에는 논 1200평을 구입하고 군복무를 마친 장남이 1급 기계기술 자격증을 취득해서 취업하게 된 것은 장(壯)한 어머니의 그 동안의 수고와 인내의 결실(結實)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