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김재찬(金在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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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1994년 4월 21일)
열행상(烈行賞)
대구직할시 북구 대현동
열부(烈婦) 김재찬(金在瓚) 59세

김재찬(金在瓚) 여사(女史)는 1953년 박철용씨와 결혼하였는데 남편은 당시 서울 철도국관내 인천 검차 사무소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불의의 열차사고로 19054년 12월에 순직(殉職)하였다.

신혼의 단꿈도 1년 만에 사라지고 슬하에 자식도 없이 남편과 사별한 김여사(金女史)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눈앞이 캄캄하여 한동안 실의에 빠졌으나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정신을 가다듬어 시부모(媤父母)님의 비통(悲痛)한 심정을 위로하면서 꿋꿋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결심하였다.

슬하에 혈육(血肉)이 없는 20세의 젊은 청상(靑孀)에게 주위의 사람들은 재혼(再婚)을 권유했지마는 김여사(金女史)는 단호히 거절하고 모든 것을 자기의 운명(運命)으로 받아 들이고 시부모(媤父母)님을 봉양(奉養)하면서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러다가 1955년 4월에 대구시 침산동에 있는 내외방적주식회사에 입사하여 68년 12월까지 14년 동안 근무하며 검소(儉素)하고 알뜰하게 절약(節約)하여 모은 돈과 퇴직금으로 집을 마련하고 충북 영동의 시댁에 계시는 시부모님을 대구로 모시게 되었다.

김여사(金女史)는 40년 동안 변함없는 수절(守節)과 생활신조로 설과 추석 명절 때 그리고 남편의 기일(忌日)에는 한번도 빠짐없이 시댁을 방문하여 연로하신 시부모님을 위로하고 정성껏 제사를 모시었다.

이것을 지켜 본 마을 사람들은 모두 보기 드문 열부(烈婦)이고 효부(孝婦)라고 입을 모아 칭송하였다.

김여사(金女史)는 1964년 5월에 큰 시동생의 장남 박성범을 양자로 입양하고 친자식처럼 뒷바라지해서 대전대학교를 졸업시키고 건축1급 기사로서 신진건설회사에 근무하게 했으니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전통적인 윤리도덕(倫理道德)과 미풍양속(美風良俗)이 무너지고 경로효친 사상이 날로 쇠퇴해가는 현대사회에서 자식을 낳고 살다가도 조금만 마음에 맞지 않으면 이혼하고 헤어지는 세상인데 김여사(金女史)는 이와 같이 꽃다운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청상(靑孀)이 되어 주위의 사람들이 개가를 권유해도 물리치고 40년 동안 일편단심(一片丹心) 수절(守節)하면서 시부모님을 극진히 봉양(奉養)하고 남편의 제사(祭祀)를 지내왔으니 참으로 보기 드문 열부(烈婦)이고 효부(孝婦)이다.

이러한 김여사(金女史)의 열행(烈行)이야말로 진(眞) 열부(烈婦)의 표상(表象)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