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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삼조(奇三朝) 여사(女史)는 18세 때 이명섭씨와 결혼했는데 일정(日政)때 남편이 사할린으로 징용(徵用)되어 가자 시부모님을 모시고 어렵고 힘든 인생이 시작되었다.
기여사(奇女史)가 결혼 당시 시댁은 천수답(天水畓) 6백평과 소작농 몇 마지기로 생활이 어려웠다.
그런데 큰댁 시숙 내외가 생활고로 만주로 떠나게 되자 연로(年老)하신 시부모님을 기여사(奇女史)가 모시게 되었다.
기여사(奇女史)는 20세 때에 득남(得男)하였고 1942년 1월에 남편이 사할린으로 징용되어 가게 되었다.
기여사(奇女史)는 남편 대신에 가장(家長) 노릇을 하면서 밤마다 깨끗이 목욕하고 정화수(井華水)를 떠 놓고 남편이 무사히 귀국하도록 빌었다.
기여사(奇女史)는 해동(解凍)하면 산과 들에 가서 손에 피멍이 들도록 나물을 캐고 뜯어 나물죽으로 연명하면서 그 나물을 팔아서 시부모님께는 고기반찬을 대접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1947년 봄에 아들이 사망하게 되자 기여사(奇女史)는 깊은 절망에 빠져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모든 것이 자기의 정성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하고 굳게 살아가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시동생과 시누이의 성혼, 출가, 분가 시에는 후의를 베풀어 동기간(同氣間)의 우애를 돈독(敦篤)히 하였다.
그러던 중, 1957년에 시아버지께서 노환(老患)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다.
기여사(奇女史)는 좋다는 약을 구하기 위해서 매일같이 칠봉산 준령(峻嶺)을 헤매면서 약초(藥草)를 캐다가 달여 드리는 등 3년 동안 정성껏 간병(看病)했으나 1960년 8월에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기여사(奇女史)는 소대상(小大祥)을 하루같이 조석전곡(朝夕奠哭)하였다.
이어 64년 겨울에는 시어머니(79세)가 세상을 떠나시게 되어 기여사(奇女史) 혼자 남게 되었다.
남편은 소식이 없고 재산도 아무것도 없으니 재혼하라고 주위의 사람들이 권유했지마는 기여사(奇女史)는 단호히 거절하고 시동생의 장남을 양자로 맞아 들여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갔다.
1983년 5월 9일 중·소 이사가족회로부터 남편의 사망통보를 받고 기여사(奇女史)는 슬픔을 금할 수 없었으나 아들을 생각하여 굳게 마음먹고 살면서 아들을 대학원까지 공부시켜 사회인으로 진출시켰다.
84년에는 이산가족회장으로부터 열녀상(烈女賞)을 받았고, 86년에는 성주군 고성이씨종친회(高城李氏宗親會)에서 감사패를 받고, 92년에는 고성이씨 종친회장으로부터 효행패(孝行牌)를 받은 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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