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김금숙(金今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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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1994년 4월 21일)
효행상(孝行賞)
경북 점촌시 공평동
효부(孝婦) 김금숙(金今淑) 44세

김금숙(金今淑) 여사(女史)는 어릴 때에 소아마비를 앓은 장애자인데 전문석씨와 결혼하여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동생과 시누이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어렵게 살면서도 화목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3년 전에 남편이 병에 걸렸다.

병원에 가서 진찰한 결과 절골암(折骨癌)이라고 했다.

부랴부랴 수술을 받았으나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고 2차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남편이 건강할 때에는 남편의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갔으나 남편이 자리에 눕게 되자 경제적(經濟的)인 어려움은 더욱 심해졌다.

김여사(金女史)는 조금도 낙망하거나 좌절(挫折)하지 않고 남편이 완쾌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정성껏 병구완(病救援)을 하고 있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아들의 병 때문에 충격을 받은 시어머니가 2년 전부터 화병(火病)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김여사(金女史)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눈앞이 캄캄하였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데 남편의 치료비(治療費)와 시어머니의 약(藥)값 그리고 두 사람의 환자를 간호(看護)해야 하니까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김여사(金女史)는 우선 남편과 시어머니의 병수발을 들어야 했다.

대소변을 받아 내고, 세수를 시키고, 더럽혀진 옷을 갈아 입히는 등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한편, 민간요법(民間療法)으로 시어머니 병에 좋다는 약을 구해다가 달여 드시게 하는 등 김여사(金女史) 자신의 몸도 불편한데 성심성의 온갖 정성(精誠)을 다해서 간병(看病)하였다.

이것을 지켜 본 이웃 사람들이 당국에 건의해서 생활보호(生活保護) 대상자로 선정되도록 주선해 주었으나 행정기관의 원조로 겨우 호구(糊口)는 할 수 있으나 치료비와 약값을 충당할 수는 없었다.

김여사(金女史)는 불편한 다리를 이끌면서 인근 마을을 돌아다니며 생활용품(生活用品)의 행상을 하고 있지만 생황형편은 나아지지 않는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고 김여사(金女史)의 이렇듯 지극한 효성(孝誠)과 간병의 노력으로 시어머니의 병환이 차츰 좋아져 지금은 혼자서 마을 나들이를 할 수 있을 만큼 회복 되었다.

이와 같이 김여사(金女史)는 자기 자신이 소아마비로 불편한 몸인데 시동생과 시누이의 뒷바라지를 착실하게 했고 남편과 시어머니의 병간호(病看護)를 정성껏 하고 있으니 김여사(金女史)의 깊은 효성과 열행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면서 효심(孝心)은 인간의 참마음의 표현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