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김춘자(金春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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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회(1994년 4월 21일)
효행상(孝行賞)
대구직할시 달서구 송현2동
효부(孝婦) 김춘자(金春子) 48세

김춘자(金春子) 여사(女史)는 천성이 유순하고 엄격한 가정에서 예의 범절을 배우고 부덕(婦德)을 닦아 1965년 19세 때에 김영길씨와 결혼하여 안정된 농촌생활을 하면서 단란하게 살았다.

그런데 남편 김영길씨는 독자라고 엄하게 기르지 않았기 때문에 가사는 돌보지 않고 방탕(放蕩)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에 노심초사(勞心焦思)한 시어머니가 식음을 전폐하고 병상에 눕게 되자 김여사(金女史)는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약을 구해다가 병구완을 했으나 끝내 소생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어머니의 상(喪)을 당해서 두서(頭序)가 없는 집안에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남편 김영길씨는 가족들도 모르는 엄청난 빚을 짊어지고 문전옥답(門前沃畓) 스무마지기를 다 팔아도 빚을 갚을 길이 없어 고민하던 끝에 가출(家出)해 버렸다.

김여사(金女史)는 남편을 원망하기보다 졸지에 망한 가정을 다시 일으켜 보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사글세방 한 칸을 얻을 정도의 빚을 내어서 성서 강창에서 시아버지를 모시고 어린 자녀 3명을 데리고 고생길에 들어 섰다.

김여사(金女史)는 가정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소금반찬과 나물죽으로 연명하면서도 시아버지에게는 쌀밥에 반찬을 장만하여 드리는 효성(孝誠)이 지극한 자부였다고 그 당시 경로당(敬老堂) 노인회장이었던 김규호씨가 증언하고 있다.

이렇게 근검절약(勤儉節約)하여 한푼 두 푼 모은 돈으로 가축을 사게 되었다.

단칸 방에 살면서 나물죽을 먹어도 가축은 김여사(金女史) 가족의 재산이요 희망이었는데 어느날 생사도 모르던 남편이 홀연 나타나서 한마디 말도 없이 가축을 팔아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주위의 친지들이 모든 것 다 팽개쳐 버리고 이혼하라고 권유했지마는 김여사(金女史)는 모든 것이 자기의 부덕(不德)한 소치라면서 시아버지와 자녀들을 두고 그럴 수는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고 궁색한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시아버지에게 용돈을 챙겨드리는 등 더욱 정성껏 봉양(奉養)하고 있다.

김여사(金女史)의 이러한 헌신적인 노력과 효행에 감동(感動)되어 남편이 과거를 참회(慙悔)하고 가정으로 돌아와서 병원 소모품을 배달하는 일을 하면서 새 출발을 하게 되었다.

자녀들도 건강(健康)하게 자라서 1명은 출가하고 2명은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 김여사(金女史)의 효행(孝行)을 높이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