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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명(李會明) 여인(女人)은 19세 때에 반신불수(半身不隨)인 남편 김지혹(金知或)씨와 결혼하여 연로하신 시부모(媤父母)님을 모시고 시동생을 돌보면서 살아왔다.
이여인(李女人)의 남편은 불구자(不具者)라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관(悲觀)으로 술로 세월을 보내고 술주정과 폭력(暴力)으로 아내를 괴롭혔다.
그러나 이여인(李女人)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오고 있는데 78년부터 남편의 건강이 악화(惡化)되어 거동이 불편하게 되자 이여인(李女人)은 남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상주(尙州)와 점촌(店村) 등지로 병원을 일 주일에 두 세 번씩 드나 들었으나 결국 병원에서 남편의 병은 회복이 불가능(不可能)하다는 진단을 받고 한때는 절망(絶望)하기도 했으나 가정에서 민간요법(民間療法)으로 치료를 계속하고 있는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졌다.
이여인(李女人)은 한방(韓方) 치료법으로 약과 침(針)과 뜸(灸) 등으로 시어머니의 병 치료를 하는 한편, 시어머니와 남편의 대소변을 받아 내는 등 잠시도 쉴 사이 없이 병간호(病看護)에 정성을 다했더니 지성이면 감천(感天)이라고 남편의 병이 조금씩 차도가 있어 많이 좋아졌고 시어머니의 병세(病勢)도 상당히 회복(回復)되어 주위의 사람들이 효성(孝誠)이 하늘이 닿았다고 칭송(稱頌)하고 있다.
이여인(李女人)은 이러한 어려운 여건(與件) 속에서도 농한기(農閑期)에는 단무지공장이나 번개탄공장 등에서 일일고용원(一日雇傭員)으로 일해서 가계에 보태는 억척스런 주부(主婦)이다.
이여인(李女人)은 89년부터 마을 부녀회장직을 맡아 주거환경개선(住居環境改善)에 노력하고 폐품(廢品) 재활용 등의 사업에 공동으로 노력하여 그 동안 모은 돈의 액수가 작년(94년)에 무려 일천삼백만원이나 되었다.
이여인(李女人)은 또 해마다 정월 대보름의 경로 윷놀이와 단오절(端午節)에 술과 음식을 차려놓고 노인들을 대접하고, 가을에는 경로관광(敬老觀光) 등을 실시하여 마을의 훈훈한 정과 인화단결(人和團結)에 힘씀으로써 출향인사(出鄕人士)들에게도 절로 알려져 경로정신(敬老精神)이 한층 높아졌고 애향심(愛鄕心)을 갖게 되었다.
이여인(李女人)의 이러한 효행(孝行)과 선행(善行)에도 불구하고 93년부터 남편의 병이 악화되어 다시 대소변을 받아 내어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여인(李女人)은 내색하지 않고 극진(極盡)히 간호(看護)하고 있으니 하루 속히 회춘(回春)의 기쁨이 있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길 빌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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