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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애(金聖愛) 여인(女人)은 영천군(永川郡) 신녕면(新寧面)에서 태어나서 1977년 20세 때에 안동(安東)에 살고 있던 장인수씨와 결혼(結婚)하였다.
김여인(金女人)의 남편 장인수씨는 8남매의 맏이로서 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운전기사 일을 하고 있었다.
남편의 봉급으로는 대가족(大家族)의 생활이 어려워서 김여인(金女人)은 남의 과수원(果樹園)과 밭일 등 날품팔이를 하면서 가계(家計)를 도우는 한편, 시부모(媤父母)님을 극진히 모시고 시누이 3명과 시동생 4명의 뒷바라지를 알뜰히 해서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시키고 현재는 출가(出嫁)해 독립하게 되었다.
그런데 1992년에 갑자기 막내 시동생이 암(癌)에 걸려 부모님 곁에 오고 싶다고 하기에 마음이 너그러운 김여인(金女人)은 두말 하지 않고 시동생의 청(請)을 받아 들여 병시중을 들게 되었다.
김여인(金女人)은 시동생의 병간호(病看護)를 정성껏 하였다.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민간요법(民間療法)으로 좋다는 약을 구해오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포도를 구해서 식이요법(食餌療法)으로 정성을 다했으나 명(命)이 다하여 94년 가을에 시동생은 사망하고 말았다.
김여인(金女人)은 실의(失意)에 빠져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시부모님을 위로(慰勞)하기 위해서 시부모님을 좋아하시는 음식을 장만하여 드리고 이웃 노인들을 집으로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시부모님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도록 배려하고 남편이 휴무(休務)하는 날에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나들이를 하는 등 더욱 극진히 봉양(奉養)하고 있다.
김여인(金女人)은 또 이웃 어른들에게도 친절하고 공손(恭遜)하며 마을에 길흉(吉凶)사가 있을 때에는 참석하여 솔선수범(率先垂範), 헌신적(獻身的)으로 일을 하고 불우(不遇)한 이웃을 돕는 등 선린(善隣)의 정(情)도 나누고 있으니 마을 사람들 모두가 효부(孝婦)라고 칭송(稱頌)하고 있다.
이와 같이 김여인(金女人)은 남편의 박봉(薄俸)으로 어려운 살림살이를 날품팔이를 해서 도우면서 3명의 시누이와 4명의 시동생 뒷바라지를 하여 모두 출가(出嫁)시켜 분가(分家)해 주고 암에 걸린 시동생의 병간호를 극진(極盡)히 했으며 시부모님을 지극한 정성으로 모시고 이웃 노인들을 공경(恭敬)하고 마을 사람들과 정답게 지내고 있으니 김여인(金女人)의 값진 희생과 인내를 잊어선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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