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김차소(金次笑)

페이지 정보

본문

제38회(1995년 4월 25일)
효행상(孝行賞)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
효부(孝婦) 김차소(金次笑) 79세

김차소 여사(女士)는 1916년 안동(安東)에서 태어났는데 출생하자 이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6세 때에 만주(滿洲)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가 평양감옥에서 옥사(獄司)하여 할아버지와 오라버니의 보살핌으로 성장하여 1913년 19세 때에 김동권(金東權)씨와 결혼(結婚)하였다.

시집간 다음해에 남편이 일본(日本)으로 유학(留學)간 5년 동안 시부모(媤父母)와 양시모(시숙모)를 모시고 시누이 다섯 사람의 뒷바리지를 하면서 집안 살림을 맡아왔다.

1940년대 초 남편은 대학진학을 포기(抛棄)하고 귀국(歸國)하여 포항(浦項)에서 직장을 구했으므로 양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되었다.

남편은 성격이 정직하고 청렴(淸廉)하였으나 이재(理財)에는 관심이 없었고 일정치하(日政治下)의 어려운 생활 속에서 아들 셋을 차례로 잃게 되었다.

1945년 조국(祖國)이 해방(解放)되자 이듬해에 남편이 광주(光州)로 전근(轉勤)가고 그곳에서 아들 딸 낳고 살았는데 6.25 전쟁 때 한동안 실직(失職)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가계를 꾸려가다가 전쟁(戰爭)이 끝나고 남편이 직장에 복직(復職)했으나 돈에 무관심한 성격 탓으로 생계의 책임은 물론이고 고향(故鄕)에 계시는 생가의 시부모님의 생활보조와 슬하(膝下)에 혈육(血肉)이 없는 시숙모님(媤叔母)에 대한 책임도 김여사(金女史)가 져야만 했다.

남편의 봉급으로는 아무리 절약(節約)해도 다섯 남매의 양육비(養育費)와 웃어른을 모실 수가 없어 삯바느질을 하고 옷감장사, 행상도 해 가면서 헌신적(獻身的)으로 노력해서 자녀들을 대학까지 공부를 시켰고 1978년에 50년 동안 모시던 양시어머니(養媤母)가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편안히 모시었다.

양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김여사(金女史)는 고향에 계시던 시가(媤家)의 시아버지를 모셔다가 봉양(奉養)을 했는데 86년에 교통사고로 거동이 불편하게 되자 94년 8월에 돌아가실 때까지 8년 동안 모든 정성을 다해 병간호(病看護)를 극진히 했다. 돌아가시기 전 2년 동안은 이발, 면도, 목욕, 대소변을 받아 내는 등 자기자신도 이미 80 노인인데 모든 시중을 다 들었다. 

뿐만 아니라 자손이 없는 시숙모(媤叔母)님도 1992년 돌아가실 때까지 돌보아드렸고 시가(媤家)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직전에 남편의 지병(持病)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手術)을 받을 때에는 남편의 병간호(病看護)와 시아버지의 병구완을 병행(竝行)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김여사(金女史)는 평생을 시부모님을 극진히 봉양(奉養)한 효부(孝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