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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수(趙甲洙) 여사(女史)는 경남(慶南) 합천(陜川)에서 명문(名門) 성안조씨의 후예(後裔)로 태어나 엄격한 가정에서 예절교육(禮節敎育)을 받고 현모양처(賢母良妻)의 미덕(美德)을 닦아 18세 때에 합천에 사는 이상봉씨와 혼인하였다.
그 당시 시댁(媤宅)은 겉보기에는 부자 같았으나 속은 비어 가난했다.
논 7~8백평과 소작농으로 대가족(大家族)이 한 집에서 살아가다가 1947년 분가할 때에 임야와 소작(小作) 농토를 가지고 잘 살아보겠다고 열심히 일을 했으나 해마다 흉년(凶年)이 겹쳐 살기가 매우 어려워 조여사(趙女史)는 해동(解凍)만 하면 산과 들을 헤매면서 나물을 캐고 남편은 노동(勞動) 품팔이로 생계(生計)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1950년 9월에 남편이 갑자기 쓰러져 조여사(趙女史)가 손가락을 깨물어 수혈까지 하고 온갖 정성(精誠)을 다 했으나 끝내 사망하였다.
이때 조여사(趙女史)의 나이 28세였다.
조여사(趙女史)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눈앞이 캄캄하였다.
여필종부(女必從夫)로 남편의 뒤를 따르려 하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시부모(媤父母)님과 어린 두 여식을 생각해서 마음을 가다듬고 나물죽으로 연명하면서 애통(哀痛)함을 금치 못하여 삼년상을 조석전곡(朝夕奠哭)하니 이웃 주민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열부라고 칭송하였다.
조여사(趙女史)는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베짜기와 비단홀치기 등으로 생활을 꾸려가고 있었는데 당시 32세이던 시숙이 회충병(蛔蟲病)을 고치려고 독한 약을 복용한 후 갑자기 위독하여 대구에 있는 권(權)내과의원에 입원해서 진찰을 받았더니 위궤양이라고 판명되어 20여년 병석에 눕게 되었다.
시숙(媤淑)의 전재산을 팔아서 병원비로 충당하고 이 때부터 조여사는 행상을 시작하였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이곳 저곳 집집마다 찾아다니는 고통(苦痛)이 심했으나 18년 동안 어렵게 모은 돈을 시숙의 병원비로 보태고도 부족하였다.
조여사(趙女史)는 1970년에 대구로 이주하여 어렵게 살아가면서도 시부모님의 기제사(忌祭事)를 정성껏 받들고 집안의 길흉(吉凶)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하여 두 딸을 명문가(名文家)에 출가시켰다.
그리고 셋째 시숙(媤叔)의 차남 장환군을 입양(入養)하여 친어머니와 다름없는 정으로 지내고 있으며 슬하에 친손과 외손의 여러 남매(男妹)를 두게 되었다.
조여사(趙女史)는 꽃다운 나이에 남편과 사별(死別)하고 시숙의 병원비 마련을 위해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수절(守節)하고 살았으니 누가 보아도 위대(偉大)한 한국의 여성상(女性像)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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