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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매자(閔梅子) 여사(女史)는 1961년 22세 때에 이해선씨와 결혼하여 시부모님을 모시고 시동생과 자녀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어려운 살림을 꾸려왔다.
민여사(閔女史)의 시댁(媤宅)은 94년에 고인(故人)이 되신 시아버지와 남편이 남의 집 품팔이를 해서 빌어오는 돈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빈곤(貧困)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민여사(閔女史)는 희망(希望)을 가지고 남편을 도와 억척같이 일을 하고 알뜰하게 살림을 살아서 9년 후인 70년에는 현재 거주하는 집과 논 세 마지기를 마련하게 되어 가족(家族)들이 끼니 걱정을 하지 않을 정도의 안정(安定)을 찾게 되었다.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민여사(閔女史)는 시동생을 한 사람씩 성취(成就)시키고 큰 딸을 고등학교에 진학(進學)시키는 등 소홀함이 없었는데 평소에 건강(健康)이 좋지 않던 남편이 병색(病色)이 완연해지면서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진찰(診察)한 결과 간경화(肝硬化)라는 진단(診斷)이 내렸다.
엄청난 병원비와 치료비(治療費)를 감당할 수가 없어 집에서 약으로 치료를 시작했으나 어려운 살림에 만사(萬事)가 여의치 않게 되자 큰 딸도 아버지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서 학교를 중퇴하고 서울 신발가게에 취직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남편의 병세는 날로 악화(惡化)되어 주변의 도움을 받아 대구동산의료원에서 수술(手術)을 받았으나 퇴원한 다음날 사망하고 말았다.
민여사(閔女史)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가눌 수가 없었으나 당장 가족(家族)들이 먹고 살아야 할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현실적인 중압감(重壓感)이 짓누르는 것이었다.
더욱이나 남편의 병원비(病院費)로 지난 10년 동안 온 가족이 근검절약(勤儉節約)해서 모은 돈도 모두 탕진(蕩盡)하고 빚만 지게 되었다.
이러한 민여사(閔女史)에게 밑천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명주 등짐 장사였다.
이 고을 저 마을 하루에 수백리 길을 걸어 다니면서 농번기(農繁期)에는 낯선 동네에서 농사일도 도와주고 수많은 고생 끝에 자녀들도 하나 둘 성혼시키고 출사시켰으며 현재는 연로하신 시어머니를 극진(極盡)히 모시고 있다.
민여사(閔女史)의 열행(烈行)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훌륭한 아내 상(像)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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