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박종선(朴鍾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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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회(1996년 4월 24일)
효행상(孝行賞)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동
효자(孝子) 박종선(朴鍾善) 45세

박종선(朴鍾善)씨는 1950년 전남(全南) 곡성군에서 박규봉씨의 장남(長男)으로 출생하여 19세 때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족들이 서울의 누님 집으로 의탁(依託)되어 박(朴)씨는 중앙시장에 있는 알미늄 그릇가게에 취직해서 일하는 한편,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2년에 군복무(軍服務)를 마치고 대구(大邱)로 이주하여 양복점의 수습점원(修習店員)으로 취직해 7년간 각고(刻苦)의 노력 끝에 79년에 대명동에서 자기의 점포(매일양복점)를 내어 독립하고 80년 4월에 결혼해서 비산동에 주거지(住居地)를 마련하여 헤어진 지 13년만에 가족들과 합류(合流)해 평범하지만 성실한 가정을 이루고 화목(和睦)하게 살고 있다.

박종선(朴鍾善)씨는 서울의 누님댁에 계시던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넉넉한 살림살이가 못되어서 호의호식(好衣好食)으로 봉양(奉養)할 수는 없어도 어머니가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온갖 정성을 다하여 모시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지병(持病)인 신경통(神經痛)으로 문밖 출입이 어려워지자 점포를 정리하고 방 한 칸을 작업장으로 개조해서 일을 집에서 하면서 어머니의 병간호(病看護)를 하게 되었다.

1989년에 돌아가신 할머니는 아들을 먼저 보내고 고향까지 떠나서 손자의 신세를 지기가 싫다면서 오시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고향의 사촌 댁에 매월 10만원씩의 생활비를 보조(補助)해 주고 월 1회 이상 찾아가서 뵙고 문안 드리는 등 손자의 도리를 다했다.

박(朴)씨는 또 일찍이 이산(離散)의 아픔을 겪어 왔기 때문에 가족에 대한 애착(愛着)과 사랑이 각별하여 87년에 여동생이 출가(出嫁)할 때까지 정성껏 돌봐주었고 처부모(妻父母)가 세상을 떠나 어려서부터 의지할 곳이 없던 처남(소아마비 장애자)을 후원해서 신체장애(身體障碍)로 중단한 학업을 독학으로 대입검정고시를 통해 영남대학교를 졸업하고 92년에 사범시험에 합격해서 법률사무소 개업(95년 3월)할 때까지 뒷바라지를 해 주었다.

박종선(朴鍾善)씨는 할머니와 어머니께 효도(孝道)할 뿐만 아니라 여동생과 처남에게도 고맙게하고 통장직을 맡아 지역사회의 발전에 봉사(奉仕)하고 있는 모범시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