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이태암(李泰岩)

페이지 정보

본문

제40회(1997년 4월 21일)
효행상(孝行賞)
경북 고령군 다산면
효자(孝子) 이태암(李泰岩) 69세

이태암(李泰岩)씨는 가난한 농가(農家)의 6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나 가정형편(家庭形便)이 어려워 학교교육도 받지 못하고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했다.

이태암(李泰岩)씨는 어릴 때부터 효심(孝心)이 남달라 14세 때에 외가(外家)에서 머슴살이를 해서 받은 품삯을 그대로 양식(糧食)이 부족한 부모님에게 드렸다.

이(李)씨는 23세 때에 어진 부인을 만나 결혼하여 전답(田畓) 300평을 타고 분가하여 신혼생활(新婚生活)을 시작했다.

이태암(李泰岩)씨는 근면성실(勤勉誠實)하여 아무리 추운 겨울날에도 매일 비봉산에 올라가 땔나무를 해다가 시장에 내다 팔고, 돌아오는 길에는 부모님께 드릴 생선을 잊지 않고 사 가지고 오는 효성(孝誠)이 지극했다.

부인 또한 어질고 부지런해서 낮에는 나물을 캐어다가 나물죽을 끓여먹고 밤에는 홀치기와 길쌈을 해서 연명(延命)해 가면서도 시부모(媤父母)님께는 고기반찬을 대접하는 효부(孝婦)였다.

그러던 중 1950년 6.25 전쟁이 발발(勃發)하자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군(軍)에 입대한 이(李)씨는 강원도 백마고지(白馬高地)의 전투에 참가했는데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살아서 7년만에 제대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이(李)씨가 무사히 귀가(歸家)한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하늘이 도와준 것이라고 환영하였다.

이태암(李泰岩)씨가 제대하고 보니 집안 살림이 어려웠으나 부부가 합심해서 더욱 부지런히 일하고 화목(和睦)하게 지냈는데 부모님이 연로(年老)하여 1969년에 어머니가 병환으로 돌아가시고 2년 후(71년)에 아버지가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이(李)씨는 애통(哀痛)함을 금하지 못해서 조석으로 전곡(典穀)하고 3년상(喪)을 정성 들여 치루었다.

이태암(李泰岩)씨는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자기가 어렸을 때 배우지 못한 것이 한(恨)이 되어 모두 교육시키고 훌륭하게 키워 사회인으로 진출시켰고 본인의 나이가 이미 7순(旬)인데도 아직도 노익장(老益壯)을 과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이태암(李泰岩)씨는 어렸을 때에 가난해서 학교공부는 못했으나 위로 형들이 있는데도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극진히 모셨고 부모사후(父母死後)에 소대상(小大祥)을 예(禮)를 다하여 치루었으니 참으로 출천지(出天之) 효자(孝子)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