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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옥(張英玉) 여사(女史)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친척(親戚)집의 양녀(養女)로 입양(入養)되어 살다가 1985년 26세 때에 강원도 고성 사는 박만식(朴萬植)씨와 결혼하였다.
시가(媤家)도 역시 농토라고는 한 평도 없는 가난한 집인데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장여사(張女史)는 남편과 의논(議論)해서 가난을 면(免)하기 위해서 경기도 광명시로 이사를 하고 남편은 건축노동자로 취업하고 장여사(張女史)는 파출부(派出婦)로 일하면서 사글세방에 시부모님을 모시고 어린 남매를 길렀다.
그러던 중, 89년에 시아버지가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져 반신불수(半身不隨)가 되어 거동이 불능(不能)하게 되었다.
장여사(張女史)는 파출부로 나가던 일도 그만두고 시아버지의 병간호(病看護)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식사의 시중을 들고, 대소변을 받아 내고, 목욕을 시켜드리고, 빨래를 하고 불철주야(不撤晝夜) 지극한 정성으로 간병(看病)했으나 2년 후에 세상을 떠나셨다.
장여사(張女史)는 평소에 살림이 곤궁(困窮)해서 음식과 약을 제대로 받들어 모시지 못한 것이 한(恨)이 되어 애통(哀痛)함을 금할 수가 없었으나 홀로 계시는 시어머니를 위로하면서 어린애를 업고 다시 파출부(派出婦)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시동생이 영세영업체에 취업 근무하다가 다리를 다쳐서 1년 동안 간병(看病)하기도 했다.
장여사(張女史)에게는 친정 오라버니가 세 분 있었는데 88년부터 1~2년 사이에 원인 모를 병으로 오빠 3명이 차례로 사망하게 되자 88년에는 친정 아버지가 화병(火病)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친정 신구들이 모두 사망하자 혼자 남아 계시는 친정 어머니가 93년에는 뇌졸중(腦卒中)으로 쓰러졌으나 간병(看病)할 사람이 없어 안타까워하고 있었는데 남편과 의논해서 광명시(光明市)에서 경산(慶山)의 친정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경산군(慶山郡) 와촌면(瓦村面) 친정집으로 이사를 한 장여사(張女史)는 남편은 경산(慶山), 대구(大邱), 영천(永川) 등지로 나가서 일을 하고, 평소에 허리 디스크와 관절염으로 고생하시던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의 병간호는 장여사(張女史)가 맡게 되었다.
이 얼마나 기구한 운명인가! 장여사(張女史)는 오늘도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의 병수발을 들고 있다.
그의 앞날에 행운(幸運)이 있기를 기원(祈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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