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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연(金甲然) 여인(女人)은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중퇴(中退)하고 1980년 17세 때에 광부(鑛夫)로 일하던 남편과 결혼하여 시어머니를 모시고 슬하에 2남 2녀를 두고 가난하지만 화목(和睦)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5년 전에 남편이 막장노동의 피로가 쌓인데다가 간염(肝炎)까지 겹쳐서 사망(死亡)하고 말았다.
김여인(金女人)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눈앞이 캄캄했으나 언제까지나 애통(哀痛)해 하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자식을 잃고 비통(悲痛)한 심정으로 누워 계시는 시어머니와 어린 4남매를 생각해서 마음을 단단히 고쳐 먹고 굳게 살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김여인(金女人)은 이웃 사람들의 주선으로 식당종업원으로 취직하게 되었다.
집이 식당에서 멀기 때문에 시어머니의 병간호가 어려워서 식당 가까운 곳으로 방을 구해 아침에는 시어머니를 부축해서 가벼운 운동을 시켜 드리고, 식사 시중을 들고 직장에 나가기 전에 하루를 편안히 쉴 수 있도록 이부자리를 깔아 드리고, 점심식사와 간식(間食)과 약 그리고 물을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챙겨 두고, 출근하고 돌아와서는 어머니의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물을 데워서 목욕을 시켜 드리고, 의복을 깨끗하게 빨아서 갈아 입히고, 시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음식을 사다 드리는 등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시어머니(媤母)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셋째 아이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가 골절(骨折)되어 입원하게 되었다.
김여인(金女人)은 직장에 나가지도 못하고 병원에서 아이를 돌보아야 하고 집에 가서 시어머니의 병간호(病看護)를 해야 하기에 하루에도 몇 번이나 병원(病院)과 집을 내왕해야 한다.
이와 같이 김여인(金女人)은 꽃다운 나이에 남편과 사별(死別)하고 식당의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지친 몸으로 극진히 시어머니를 모시고 병간호를 하면서 아이들의 양육(養育)에 온갖 힘을 기울이고 있으니 요즘 도시의 젊은이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효부(孝婦)이고 장(壯)한 어머니라고 마을 사람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칭송(稱頌)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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