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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순 여사는 경북 상주군 내서면 연원동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현모양처의 미덕을 닦아 1942년 17세 때에 예천군 용궁면 읍부리에 사는 김근실씨와 결혼하였다.
이여사가 시집 올 당시는 둘째 며느리였으나 시숙이 6.25 전쟁 때 행방불명이 되자 이여사가 시부모님을 모시고 어린 조카들을 돌보아야 하는 맏며느리 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이여사의 시아버지는 3대 독자로서 자식 형제를 끔찍히 사랑하고 아꼈는데 맏이가 행방불명이 되자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불안한 나날을 보내면서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말았다.
이여사는 시부모님이 상심하는 것을 조금이라고 덜어 드리기 위해서 조석으로 문안드리고, 집안의 모든 일을 시부모님께 상의해서 처리하고, 성심성의껏 부모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시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고 즐겁게 해 드리려고 노력하였다.
이여사는 타고난 성품이 대범하면서도 매사에 자상하기 때문에 조카들의 뒷바라지에도 친자식과 조금도 차이없이 소홀하지 않았다.
이여사의 남편 김근실씨는 철도공무원으로 일했는데 대쪽같이 강직한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 청렴결백하여 재직하고 있을 때에 대통령 표창도 받은 모범 공무원이었으나 1972년에 고혈압으로 쓰러져 재기하지 못하고 타계하였다.
이여사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 눈앞이 캄캄하고 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자식을 잃은 시부모님들이 식음을 전폐하고 실의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애통하다고 언제까지나 울고 있을 수 만은 없었다.
이여사는 초종범절을 마치고 4남 4녀의 자식(시부님의 손자손녀)들을 앞세워 시부모님을 위로하고 남편이 살아 계실 때보다 더 지극한 정성으로 봉양하면서 남편 대신에 실질적인 가장이 되어 모든 가사를 도맡아 처리하면서 시부모님의 마음을 안정 시키는 데 온갖 정성을 다 하면서 자식들과 조카들의 뒷바라지를 더욱 알뜰히 하였다.
태산같이 믿었던 남편이 사망한 뒤에 가세는 더욱 기울어져 가정형편이 날로 어려워졌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다. 다만, 그 운명을 어떻게 지혜롭게 헤쳐 나가는가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여사는 남자들도 하기 힘드는 농사일을 여자의 몸으로 도맡아 하면서 춘하추동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여사의 이러한 헌신적인 노력으로 조카들과 4남 4녀의 자녀들을 모두 성취시키고 출가시켰다. 주어진 운명을 아무도 거역할 수 없듯이 닥쳐오는 불행 또한 그런 것이다. 불행은 아무도 원하지 않지만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닥쳐 올런지 아무도 모른다.
이여사의 아들 영기와 결혼한 자부 김영희씨가 간질병으로 수시로 넘어져서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더니 급기야 가출하고 말았다. 행방이 묘연하여 백방으로 수소문 했으나 끝내 찾을 수가 없어 손녀 2명을 떠맡은 이여사는 장애인으로 불구인 아들을 돌보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여사는 이 모든 것이 자기의 부덕한 소치라고 뉘우치고 운명이라고 체념해 버린다. 그래서 이여사는 원망하거나 내색하지 않고 언제나 화목한 가정을 이끌어 가고 있다.
이여사는 자기 자신의 나이도 72세의 노인으로서 누구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살아갈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100수의 시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하면서 편안히 모시려고 온갖 정성을 다하고 있다. 조석으로 문안 드리고, 옆에 앉아서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말벗이 되어 드리고, 방안 청소를 깨끗이 하고, 목욕을 자주 시켜 드리고, 새 옷으로 갈아 입히고, 방안의 온기를 조절하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등 지극한 정성으로 시봉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시어머니의 건강이 조금 회복되어 식사도 잘하고 화장실 출입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여사는 시어머니의 건강이 회복된 것을 보고 아이들처럼 기뻐하고 있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는 마을 사람들은 출중한 효부라고 이구동성으로 칭송하고 있으나 이여사는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남들처럼 잘 모시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겸손하게 말하고 있다.
이여사는 천성이 어질고 착할 뿐만 아니라 자라면서 엄격한 가정에서 윤리도덕을 배워 효의 정신이 몸에 배어 있어 시부모님을 극진히 모시면서 한번도 시부모님의 뜻을 거역하거나 마음을 불편하게 한 적이 없으며 남편과 사별하고 25년 동안 어려운 살림살이를 혼자서 도맡아 오면서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조카와 4남 4녀의 자녀를 훌륭하게 양육해서 성취시키고 출가시켰으며 자기 자신의 나이가 72세의 노인인데도 100세의 시어머니의 시중을 들면서 시어머니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으나 참으로 보기 드문 효부이다.
서양문명이 밀려오면서 전통적인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따라서 경로효친 사상이 날로 쇠퇴해가는 오늘날, 더욱 산업사회가 핵가족 제도를 불러 들여 부모님을 모시지 않으려고 하는 세상에서 이여사의 효행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여사의 여생에 행복이 있기를 기원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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