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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순(白雲順) 여인은 1988년 이병훈(李炳勳)씨와 결혼하였다.
당시 시댁에서는 남양공원 묘지를 유치하기 위해 대대로 내려오던 선산(先山)을 팔아 동리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 버리자 시숙은 가산(家産)마저 탕진하고 어린 두 조카만을 남겨 두고 시숙부부는 이혼한 상태였다.
매일 술만 마시고 가사도 돌보지 않은데다 시부마저 술로 세월을 보내는 파산(破産)상태의 형편이었다.
그러나 시모님과 남편은 가정을 일으켜 세우려고 첫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근농(勤農)한 까닭에 하우스농이 잘 되었다.
이에 두 조카를 친자식 이상 교육시켜 금년에 큰 조카는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한다.
매일 술 타령만 하시던 시부께서 93년부터 중풍으로 거동불능이 되자 그 바쁜 농사 중에도 정성어린 자부(子婦)의 효행으로 지금은 많은 차도(差度)가 있어 기쁘기는 하나 술은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있다 한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농촌에서는 참외 수확으로 한창 바쁠 때 건강하시던 시모님께서 너무나 심한 노동 탓인지 뇌출혈로 사경을 헤매게 되어 입원을 시켰다.
낮에는 시부 간병과 영농(營農), 밤에는 시모님의 간병으로 정신차릴 여유 없이 정성을 다한 덕분인지 2개월 후 천우신조(天佑神助)로 시모님께서는 의식을 되찾게 되었다.
몇 차례의 수술과 중환자실에서 장기간 입원으로 넉넉지 못한 살림마저 힘들게 되어 통원치료 하기로 하고 6개월이 지나 퇴원(退院)을 하여 건강회복은 못 하였으나 병세가 호전(好轉)되고 있다 하니 그 모두가 백(白) 여인의 지극한 효성의 덕이라고 모두가 찬사(讚辭)를 아끼지 않고 있다.
94년 말 남의 집 단칸방에서 생활하시던 부모님을 더 이상 그대로 둘 수 없어 시멘트 블록이지만 20평의 새집을 지어 두 조카와 부모님이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해 드렸지만 정작 자신의 가족들은 남의 집에서 살고 있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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