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황미자(黃美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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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회(1999년 4월 27일)
효행상(孝行賞)
경북 칠곡군 왜관읍
효부(孝婦) 황미자(黃美子) 59세

강릉에서 황씨(黃氏) 집안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황미자(黃美子) 여사는 어릴 때부터 효녀라고 이웃분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성장하였으며, 왜관에 거주하는 항일독립 운동순국의사

장진홍(張鎭弘) 선생의 장손인 장상규 씨와 결혼하였다.

시부께서는 선고(先考)께서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옥중 자결하신 여한(餘恨)으로 속병을 앓으시면서도 매일 앞산의 순국의사비에 참배(參拜)하시었다 한다.

시가는 시조부께서 독립운동하시느라 가산(家産)이 기울어 시부모와 9남매가 보훈연금으로 근근이 살고 있었다. 

남편은 대가족의 생계를 위해 20여년간 온갖 일을 하다가 낙동강 건너편에 조그만 전자제품 부품공장을 차려 아들과 함께 일을 하고 있다. 

시부께서는 70세를 넘기면서 기력이 쇠하여 간암(肝癌)을, 시모는 중풍에다 치매까지 겹쳐 같이 입원시켜 남편과 교대로 지극정성(至極精誠)으로 수발하였다.

그러나 간병한 보람도 헛되이 시부께서는 96년 6월 항년(享年) 86세로 세상을 버리시니 아침 저녁으로 곡례(哭禮)를 다하여 상(喪)을 치루었다. 

시모께서는 치매가 더욱 심해져 지금은 부부가 시모님과 한방 거처를 하면서 수잠을 자고 대·소변을 받아내기, 식사수발, 아침 저녁으로 목욕시키기와 용변으로 더렵혀진 이불세탁을 하여 주위를 청결하게 하고 있다.

요즈음에는 아예 아침에 같이 공장에 모시고 가서 공장에 딸린 방에서 누워 계시게 하면서 시탕(侍湯)과 수발을 하다가 저녁에 다시 모시고 집으로 온다고 한다.

그와 같은 눈물겨운 효성의 보람도 없이 98년 12월 시모께서도 운명하시니 자신의 불효를 탓하면서 예를 다하여 상을 치루었다.

황(黃) 여사는 순국의사(殉國義士)의 사부(嗣婦)로서 효성(孝誠)을 다함을 안 각처에서 여러 차례 표창을 하려 해도 시부모 생전에 누(累)가 된다면서 고사(固辭)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