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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申) 여사는 1978년 슬하에 3남매를 둔 채 저 세상으로 가버린 남편과 사별하고 험한 세상을 살아나가야만 했다. 재산이라곤 한 푼 없었으며, 남편의 병원비로 남은 건 빚 뿐이었다.
살아갈 길이 막막하여 3남매와 같이 남편의 뒤를 따를까 하고 몇 번 마음도 먹었지만 이를 악물고 3남매를 키우면서 온갖 험한 일을 다 하면서 살아왔다.
어렵게 살아오던 1983년 어느 날 품을 팔기 위해 창수면 백청리 골짝마을 누에치는 박병환씨 집에까지 찾아갔었다.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하는 처지에 있다 보니 돈이 되는 곳은 어디든지 가서 일을 해야만 했다. 그때 주인 박병환 씨도 부인이 가출하여 어린 4남매를 키우며 어렵게 농사를 짓고 있어 집안살림은 형편이 없었다.
신(申) 여사는 누에치는 일을 하면서 그곳의 집안 살림도 해 주면서 계속 품팔이를 하였으며, 영해에 어린 남매 3명은 저희들끼리 밥을 해 먹으면서 학교를 다니게 했다. 1986년 처지가 비슷한 두 가정을 합쳐 6남매와 같이 살기로 하였다. 박병완씨는 워낙 부지런하고 성실하여 마을에서도 인정받는 사람이어서 신위교 씨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으며 낮에는 누에와 담배농사일에 매달리고, 밤에는 광산에 가서 둘이 돈 버는 일을 하며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1990년 4월 5일 최악의 날을 맞았다. 일하러 간 사람이 밤 늦도록 오지 않기에 마을 사람들과 등불을 밝혀 밭으로 가 보니 캄캄한 길에 경운기를 몰고 오다가 낭떨어지에 떨어져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었다. 동민들의 협조로 영해 병원에 갔으나 치료가 불가능해 대구동산병원 읍급실에 가서 다음날 수술을 받았지만 생명이 위독하였다.
하나님이 도우셨는지 정성을 다해 간병해 생명은 구했으나 4개월 치료 후 퇴원하여 집에서 간호하였다. 입으로는 음식을 못 먹고 목구멍을 뚫어 미음을 먹어야 했고, 대·소변을 받아 내는 매우 처참한 가운데서도 열심히 병구완에 온갖 좋다는 약으로 최선을 다해 보았으나 끝내 남편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손과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자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꺼져 가는 등불과 같은 남편을 보살피며 6남매를 다 출가시켰으며, 오직 한마음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강인하고 현숙한 이 시대의 열녀라 칭찬이 자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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