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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施) 여사는 1927년 3월 13일 운수면 화암리에서 시영상과 김옥순 사이에서 6남매 중 차녀로 출생하였다.
12세에 어머니는 병환으로 작고하시고 조부모님 슬하에서 성장 중 16세에 김흥우 씨와 결혼하였다.
시집에 와서 보니 남편은 5남매 중 장남이었다. 남편은 고용살이를 하였지만 생활이 매우 어려워 자신도 집에서 가축을 사육하여 생활의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다. 맏며느리로서 당시 농민지도원(農民指導員)이신 남편과 함께 시부모를 모시고 혼전(婚前) 시누와 시동생, 슬하 어린 3남매를 키우면서 생활하였다.
1954년 3월에 의사당에서 면의원과 마을동장, 농민지도원 연석회의 중 갑작스런 돌풍으로 의사당의 가건물이 붕괴되어 남편은 압사당하였다. 졸지에 청천벽력이라, 28세의 새댁으로 임신 중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단지혈(斷指血)로 수혈하니 이미 사망한지라 자결하려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3일 후 면사무소장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이후부터 어린 3남매, 시동생, 시누이를 돌봐야 했고, 또한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면서 온갖 행상으로 생활을 해 나갈 때 1945년 9월에 유복자를 출산하였다. 그리고 1956년 시부께서 뇌졸중으로 수족이 마비되어 식사수발, 대·소변 처리에 지극정성을 다 하였지만 3년 만에 별세하니 장사를 후히 치뤘다.
고독한 시모님을 모시고 시누 4남매를 모두 출가시켰으며, 1966년 3월에 시모께서 쓰러져 거동이 불편하자 휠체어를 구입하여 수시로 마을 어르신들과 벗을 하도록 하고, 좋다는 약은 다 해 드리는 등 극진히 봉양하였지만 6년 뒤에 별세하고, 장사는 시부와 같이 했더니 지역주민의 칭송이 자자했다.
이러한 사이에 가산은 말 못할 지경이었지만 4남매를 교육시켜 출가하니 어머니의 효성을 본받아 형제간 우애 있어 시(施) 여사는 이 시대의 어머니 상이라 하여 대구경북 김녕김씨종친회(金寧金氏宗親會)에서 효열부상(孝烈婦賞)을 수상한 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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