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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각면 덕양리의 최금옥(崔金玉) 씨가 살아온 삶의 이야기는 누구든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최금옥 씨는 각남면 샘촌에서 최성달 씨의 4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나 1974년 25세 되던 해 풍각면 덕양리 故 박지식 씨에게 시집을 왔고, 시부모님(시부 55세, 시모 45세)을 친부모님 못지않게 정성으로 모시고 집안일도 척척 잘하는 살림꾼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러나 순탄할 것만 같았던 결혼 생활이 5살 된 둘째 아이의 실종과 사망으로 한 차례 시련을 겪게 되었고, 평소 건강하시던 시아버지께서는 쓰러지신 후 정성 어린 오랜 수발에도 불구하고 1989년 돌아가셨다. 남편의 죽음 때문이었을까? 시어머니의 건강 또한 하루가 다르게 나빠지기 시작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8년 남편 박지식 씨도 오랜 암 투병으로 별세하여 홀로 시어머니를 모시는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받는 가장 큰 상처이자 스트레스가 자식의 죽음이고 다음이 남편의 죽음이라고 한다. 최금옥 씨는 어린 자식을 앞세우고 의지하던 남편마저 떠나보낸 딱한 처지였지만,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시어머니와 자식들을 생각하면 마음 놓고 주저앉아 슬퍼할 처지 또한 아니었다.
여자 혼자의 몸으로 연로하신 홀 시어머니와 두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거동이 불편하신 시어머니를 매일 아침 병원에 모시고 갔다 오는 것과 생계를 위해 10년가량 혼자 짓고 있는 고추 하우스의 일이 모두 최금옥 씨의 몫이었다.
고추농사(400평 가량)가 다섯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터라 밭일이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끼니때가 되면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밥을 지어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지극한 정성을 보였다. 그렇게 몇 년을 당신의 몸은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던 중, 한 번의 큰 눈 수술과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억척스럽게 지어오던 고추농사 조차 못할 정도로 몸이 나빠졌고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시동생의 적극적인 권유와 결정으로 시어머니를 노인요양시설인 효 사랑 마을에 모시게 되었다. 그러나 최금옥 씨는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것 같은 죄스러운 마음에 하루도 빠짐없이 요양원을 방문하여 시어머니의 건강을 체크하고 행여 불편한 곳은 없는지 친딸보다 더 꼼꼼하게 시어머니를 살펴드렸다.
본디 본성이 말수가 적고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려하여 평소에도 아무도 모르게 1주일에 한번 가량 어려운 분들을 위해 밥이나 국수 등을 대접하는 등 자신이 처한 어려운 현실에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어른 모시기를 실천하였다.
이런 힘든 상황에서도 유일한 삶의 희망은 두 아들들이었다. 어머니를 그대로 닮아 효행심이 남다른 두 아들 중 큰아들은 전문대를 졸업하고 장가를 가서 대구에서 자리를 잡았고, 둘째 아들은 행여나 어머니에게 부담이 될까 대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고등학교를 졸업 후 천안에서 삼성계열 회사에 생산직으로 일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바르고 건강하게 자라준 두 아들을 생각하면 당신의 힘든 삶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라며 자랑스러운 아들들 이야기에 입가에 미소를 지으시며 이제 그만 자식들에게 도움도 받고 당신의 몸 생각해서 좀 쉬시라는 말에 절대로 자식들에게 짐이 될 수 없다며 오늘도 절레절레 손사래를 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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