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유번이(柳蕃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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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1965년 2월 23일)
보화상(補化賞) 본상(本賞)
안동군 임하면 송천동
효부(孝婦) 유번이(柳蕃伊) 52세

유(柳)씨는 20년 동안이나 견딜 수 없는 비극과 절망, 고난을 잇달아 겪어왔으면서도 학(鶴)처럼 고고하고 잔잔하다. 

그녀의 표정에는 허탈과 체념의 틈바구니라고는 찾아 볼 수 없고, 자기극기(自己克己)에서 오는 조용함과 너그러움 만이 가득 차 있다.

유(柳)씨가 결혼 이후 계속 덮쳐온 비극을 조용하게 극복하고 전통 있는 가문의 위엄을 계승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어려서부터 익혀온 효(孝)의 관념이 그녀의 생활을 지배해왔기 때문이었다. 

유(柳)씨는 우리나라 대유문(大儒門)의 후손인 유중호(柳中鎬) 씨의 장녀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엄한 가풍 속에서 인종(忍從)의 미덕(美德)을 익혔다. 특허 그녀가 부모(父母)로부터 평생 동안 실천하고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배운 감명 깊은 교육은 「효(孝)」였다. 

「효(孝)」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돼 사회로, 그리고 국가를 위한 충(忠)에까지 연결돼 밝은 사회, 부강한 국가를 이끌 수 있는 근본이라는 것을 그녀는 철저하게 익혔다. 

18세에 당시 우리나라 석학(碩學)의 한 사람이었던 해창(海滄) 송기식(宋基植) 선생의 장남 병기(炳譏) 씨와 결혼했을 때 그녀는 이미 그 동안 배워온 「효(孝)」의 정신을 충실하게 실천해 오고 있었던 성숙한 효녀(孝女)였다. 

柳씨가 결혼했을 당시 시부(媤父)는 일본(日本) 경찰의 심한 고문으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은거한 채 요양생활을 하고 있었다. 

시부(媤父)는 주권(主權)을 잃은 민족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독립투사들과 접촉하면서 항일운동을 벌이다 왜경(倭警)에 검거돼 대구(大邱)형무소에서 2년간이나 복역하는 시련을 겪었다. 

독립투사 집안의 맏며느리로 들어간 柳씨는 결혼식 다음날부터 요양생활을 하고 있는 시부(媤父)의 건강을 돌보아야 하는 중책을 떠맡았다. 

시부(媤父)는 쇠약한 몸으로도 일제(日帝)로부터 주권을 되찾기 위해서는 2세 교육이 필요하다면서 사재를 털어 학당(學堂)을 창설, 주민들 교육에 전념하고 있어서 시부(媤父)의 건강을 돌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밤 늦게까지 학당에서 2세 교육에 전념하고 있는 시부(媤父)에게 음식을 날라야 했으며, 어떤 날은 과로로 쓰러진 시부(媤父)를 업고 한의원에 달려가기도 했다. 

첫 불행은 그녀 나이 34세 때 시부(媤父)의 별세(別世)라는 충격으로 닥쳐왔다. 1남 3녀를 두고 단란한 생활을 꾸려오고 있던 유(柳)씨에게 시부(媤父)의 타계(他界)는 큰 시련이었다. 

그 동안 며느리의 알뜰한 보살핌으로 건강을 회복해 해방과 함께 자유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던 시부(媤父)가 이 마을을 휩쓸고 있는 괴질(怪疾)에 걸려 희생된 것이다. 

그러나 시부(媤父)의 별세(別世)로 인한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더 큰 불행이 이 가정을 강타해 왔다. 

시부(媤父)의 장례식을 마치고 피로와 슬픔에 지쳐 늘어졌던 남편이 시부(媤父)가 앓던 병과 똑같은 증세로 시름시름 앓더니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숨진 것이다. 

남편의 죽음을 운명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여인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유(柳)씨도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비통함을 견디지 못하고 평범한 여인들처럼 절규와 몸부림으로 하늘을 원망했다. 

그러나 또다시 몰려온 비극에 맞부딪히고는 그녀는 분노에 차서 서서히 덮쳐오는 비극과 과감히 맞서는 용기를 갖게 됐다. 

또 다시 덮친 비극이란 남편의 장례를 치른 지 한 달 만에 이 집안의 유일한 기둥이었던 시모(媤母)마저 쓰러진 것이었다. 남편과 아들을 일시에 잃은 시모(媤母)의 충격은 너무 격렬했던 것 같았다. 

아들 장례식에 의식을 잃고 쓰러진 시모(媤母)는 한 달 동안이나 심한 열로 헛소리만 하더니 두 눈의 시력을 잃게 된 것이다. 신(神)이었다면 이것은 터무니없는 장난일 것이다.

3개월 동안에 3가장을 일시에 쓰러뜨린 신(神)의 장난을 그녀는 원망하기 보다는 서서히 대결하면서 개척해 나가겠다는 굳은 결의로 생활에 집착했다. 

3개월 동안에 이 가정의 재산은 반으로 줄어들었으며 1년 후에는 시모(媤母)의 치료비로 나머지 재산마저 탕진했다. 

이제 그녀는 완전한 무(無)에서 새로운 생활을 창조해내야 했다. 

품팔이 생활에서부터 농부의 고된 노역까지 그녀에게 맡겨진 일이라면 서슴없이 해냈다. 

고왔던 얼굴과 손은 남자에 못지않게 거칠게 변했으며 호화롭던 과거의 생활은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검소해졌다. 

어려운 생활 중에서도 시모(媤母)의 시중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귀한 약재나 음식은 빚을 내서라도 구해 시모(媤母)를 공양했다. 

오뚝이처럼 절망으로부터 헤쳐 나오던 그녀에게 신(神)은 또 한 번 시련을 안겨주었다. 

이 가정의 대를 이어갈 유일한 아들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것이었다. 안동(安東)사범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아들은 조부의 뜻을 이어 2세 교육에 헌신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있었으나 불의의 사고로 꿈을 키워보지도 못한 채 요절한 것이다. 유(柳)씨는 아들을 잃은 절망도 용케 견디어 냈다. 

그리고 또다시 새로 출발한다는 마음으로 눈먼 시모(媤母)와 남은 세 딸을 열심으로 돌보고 있다. 

가난 속에서도 그녀는 시부(媤父)가 운영하던 학당을 육영사업에 회사해 시부(媤父)의 뜻을 이어 갈 수 있도록 했다. 

이 학당은 안동군(安東郡) 임하면(臨河面) 송천국교(松川國校)의 모체가 되어 1만여 명의 인재를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