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장금이(張今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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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1985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달성군 화원면
효부(孝婦) 장금이(張今伊) 63세

장금이(張今伊) 여사(女史)는 20년전(年前) 남편(男便) 임무학씨(林武學氏)와 사별(死別)한 후, 87세(歲)의 시모(媤母)님을 모시고 슬하(膝下)의 6남매(男妹)와 더불어 힘겹게 농토(農土)를 가꾸며 살아왔다. 

남편(男便)과 사별(死別)한 그 해에, 장여사(張女史)의 장남(長男)은 이제 겨우 15세(歲)의 소년(少年)이어서 농사(農事)일도 그가 혼자서 꾸려가야만 했으며, 생계(生計)에 부족(不足)한 공백(空白)도 품팔이와 막노동(勞動) 등 고된 노역(勞役)으로 메워 나가야만 했으니, 남자(男子)도 아닌 여자(女子)의 몸으로 심신(心身)인들 오죽 고달프고 괴로왔으랴. 

그러던 중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시모(媤母)님이 중풍(中風)이란 중병(重病)으로 눕게 되어 그의 손길은 더욱 바쁘기만 하였다. 

발병(發病) 5년 후(年後)부터는 전신마비(全身痲痺)로 기동(起動)이 불능(不能)해지면서 대소변(大小便)까지 처리(處理)해야 하는 어려운 지경(地境)에까지 빠져 들어갔다. 

시모(媤母)님이 중풍(中風)으로 병석(病席)에 눕게 된 그 다음 날부터 명약(名藥)을 구(求)하기 위해 때로는 50여리(餘里)가 넘는 산골마을을 찾아가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인근(隣近)의 한의원(漢醫院)과 도회지(都會地)의 병원(病院)등을 두루 찾으면서 구환(救患)에 전심전력(全心全力)을 다하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틀이 멀다 하고 산중(山中)을 헤매면서 약초(藥草)를 채취(採取)하여 정성(精誠)껏 약탕관(藥湯罐)에 달여 드리는 등 그의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은 끝이 없었다. 

장여사(張女史)의 효성(孝誠)이 얼마나 극진했던지 인근주민(隣近住民)들은 한결같이 그의 효심(孝心)에 감동(感動)하고 있었다. 

"잔치집이나 상가(喪家)에 가서 음식(飮食)이 나오면 맛없는 것만 자신(自身)이 먹고, 맛있어 보이는 음식(飮食)은 품 속에 감춰 뒀다가 꼭 시모(媤母)님께 갖다 드리는 그의 놀라운 정성(精誠)은 탄복(歎服)할 정도였다."라는 동민(洞民)의 말 그대로, 장여사(張女史)는 시장(市長)에 다녀올 때마다 시모(媤母)님에게만 간식(間食)을 꼭 사다 드리는 바람에, 6남매(男妹)의 자녀(子女)들로부터 비정(非情)한 어머니라는 원망(怨望)을 들을 때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리 만큼, 그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은 오직 시모(媤母)님에 대한 극진한 봉양(奉養)뿐이었다. 

1,500평(坪)의 농토(農土)로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면서 그 동안 1남(男) 4녀(女)를 모두 결혼(結婚)시키고, 지금은 막내아들 하나만이 슬하(膝下)에 남았는데, 막내아들도 전문대학(專門大學)을 졸업(卒業)한 후(後) 사회(社會)의 훌륭한 일꾼으로 활약중(活躍中)이다. 

오늘도 그의 시모(媤母)님 병세(病勢)가 조금도 호전(好轉)되지 않고 지난 해나 올해나 제자리걸음에서 맴돌고 있지마는, 조금도 체념(諦念)하거나 낙담(落膽)하는 일 없이 오늘도 꼬박 시모(媤母)님 곁에 지켜 앉아서 간호(看護)의 손길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그는 무학(無學)이긴 했지만 효(孝)의 진의(眞意)만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공기(空氣)와 물이 항상(恒常) 우리 곁에 있을 때 그 귀중(貴重)함을 모르고 있듯이, 부모(父母)가 안 계실 때 부모(父母)의 사랑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효(孝)란 부모(父母)가 생존(生存)해 있을 때 다해야 하는 것이다." 그의 말 그대로 장여사(張女史)는 오늘도 실천(實踐)을 통해서 효(孝)의 참뜻을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