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이말순(李末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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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1985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대구직할시 남구 상인동
효부(孝婦) 이말순(李末順) 54세

1,000여평(餘坪)의 밭을 생활근거(生活根據)로 삼으면서 4남매(男妹)를 낳고 그런 대로 행복(幸福)하게 살아온 이말순(李末順) 여사(女史)에게는, 1975년(年) 남편(男便)과 사별(死別)한 후(後)부터 역경(逆境)의 거센 바람이 전신(全身)을 휩쓸기 시작하였다. 

우선(于先) 당장 그가 해야 했던 일은 여자(女子)의 몸으로 농사(農事)를 꾸려가는 일과 남편(男便)이 없는 가정(家庭)을 이끌고 가야 할 여가장(女家長) 노릇이었다. 비록 매사(每事)가 어려운 일이긴 했지만, 굳건한 의지(意志)와 노력(努力)으로 참고 견디면서 생활(生活)이 공백(空白)을 그런 대로 알차게 메워 나갔다. 

그런데 불운(不運)은 또 이어졌다. 이여사(李女史)가 남편(男便)과 사별(死別)한 2년 후(年後)에 시모(媤母)님이 중풍(中風)으로 쓰러지면서 기동(起動)이 불자유(不自由)스러운 병석(病席)의 몸이 되었다. 전신마비(全身痲痺)로 꼬박 병석(病席)에 누워 있어야만 했으므로, 이여사(李女史)의 걱정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매일(每日)같이 대소변(大小便)을 손수 받아내야 하는 일과 방(房)안을 청소(淸掃)하게 해야 하는 일, 환자(患者)의 옷을 매일(每日) 빨아서 갈아 입히는 일, 양치질과 목욕(沐浴) 등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이 드실 때까지 그의 정성(精誠)이 뒤따라야만 했으니. 이여사(李女史)의 심신(心身)인들 얼마나 고달프고 괴로왔으랴.

매일(每日)같이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간병(看病)했지만 병세(病勢)는 조금도 회복(回復)될 기미(氣味)를 보이지 않고 어제나 오늘이나 제자리걸음이었다.

이여사(李女史)는 너무나 안타까운 나머지 매일(每日)새벽 정화수(井華水)를 떠 놓고 간절히 두 손 모아 기도를 하기도 했다. 

'모든 것은 내 정성(精誠)이 미흡(未洽)하고 내가 부덕(不德)한 탓이다. 시모(媤母)님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생각하지 않는 탓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시모(媤母)님을 내 몸 이상(以上)으로 공경(恭敬)하면서 간병(看病)하자.' 이여사(李女史)는 이와 같이 스스로 자책(自責)하면서 그 날부터 더욱 정성(精誠)을 다해 사랑으로 병석(病席)을 지켜 나갔다. 

취로사업장(就勞事業場)이나 그 밖의 일터에서 일을 하다가도 점심시간(點心時間)만 되면 어김없이 집으로 달려가 시모(媤母)님의 점심식사(點心食事)를 차려 드리고 돌아오는 등, 시모(媤母)님께 바치는 그의 효성(孝誠)은 지극(至極)하다 못해 거룩할 정도였다. 

흔히 있는 계(系)모임이나 관광(觀光)바람도, 병석(病席)의 시모(媤母)님을 생각해서 일절(一切) 외면(外面)하고 있는 이여사(李女史)는, 그의 간병(看病)하는 자세(姿勢)가 어떻게나 정성(精誠)스러웠던지 꼭 부처님이 중생(衆生)의 손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만 같다는 어느 주민(住民)의 말이었다. 

그 자신(自身)이 일과 간호(看護)에 지쳐 몸져 누워야 할 때도 많았지만, 시모(媤母)님 앞에서는 절대(絶對) 그런 내색(內色)을 하지 않고 간병(看病)을 하곤 했다.

지난 1983년(年) 12월(月) 단양우씨(丹陽禹氏) 판서공파(判書公判) 문중(門中)에서 시상(施賞)하는 第一回(제1회) 효부상(孝婦賞)을 받기도 한 이여사(李女史)는, 평소 자녀(子女)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이런 말로 효(孝)의 참뜻을 일깨워 주곤 했다. 

"역사(歷史)를 만든 것은 노인(老人)들이다. 하늘보다 높고 바라보다 깊은 아버지의 은혜(恩惠)를 비단 자신(自身)의 부모(父母)에게만 베풀 것이 아니라, 노인(老人)들 모두를 부모(父母)라고 생각하면서 공경(恭敬)하도록 해라. 바로 그것이 경로사상(敬老思想)이니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