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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농부(農夫)의 아내로 시집온 김희(金姬) 여사(女史)는, 어느 집안의 시집살이에도 뒤지지 않을 고된 생활과 맞서야 했다. 그가 시집살이를 시작하면서 맨 먼저 맞은 고난(苦難)은 시모(媤母)님이 중풍(中風)으로 쓰러지신 일이었다.
결국 기동(起動)이 불능(不能)한 시모(媤母)님을 위하여 대소변(大小便)을 손수 받아내야 했고, 옷을 갈아 입고 목욕(沐浴)을 할 때도 김여사(金여사)의 손길이 필요(必要)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석(朝夕)으로 밥을 일일이 떠먹여 드려야 하는 등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은 끝없이 이어져 갔다.
그러나 시모(媤母)님의 병(病)이 5년(年)을 계속하는 동안에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그의 시부(媤父)님 또한 중풍(中風)으로 병석(病席)에 눕게되니, 김여사(金女史)의 손길은 더욱더 바빠져만 갔다.
시모(媤母)님의 구환(救患)에 지친 몸으로 시부(媤父)님의 간호(看護)에 매달리기를 다시 5년(年)이나 계속 되었으니, 결국 시부(媤父)님은 세상(世上)을 등지고 말았다.
이제 시모(媤母)님을 위하여, 시부(媤父)님께 못다한 정성(精誠)을 더욱 알뜰히 바치겠다고 다짐하던 김여사(金女史)에게 또 한 번의 고난(苦難)이 들이닥쳤다.
불운(不運)의 연속(連續)이라고나 할까, 이번에는 남편(男便)이 고혈압(高血壓)으로 갑자기 쓰러지더니, 끝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불귀(不歸)의 몸이 되고 말았다.
이로 인(因)하여 생활(生活)은 더욱더 곤궁(困窮)에 빠지게 되었으므로 김여사(金女史)는 여자(女子)의 몸으로 공장(工場)일과 파출부(派出婦), 막노동(勞動) 등 손에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면서 슬하(膝下)의 4남매(男妹)를 키워 나가야만 했다.
한편으로는 74세(歲)의 시모(媤母)님을 정성(精誠)들여 봉양(奉養)하면서 살아왔다.
"김여사(金女史)가 걸어온 반평생(半平生)의 발자취는 시부모(媤父母)님의 간병(看病)으로 일관(一貫)해 온 삶이었다. 남편(男便)과 사별(死別)한 후(後)에도 절망(絶望)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의 믿음직스러운 자세(姿勢)를 볼 때마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라는 김여사(金女史)를 지켜본 어느 인근주민(隣近住民)의 말대로, 그는 굳세고 자랑스러운 오뚝이였다.
효심(孝心)이 깊은 김여사(金女史)는 해마다 맞는 시모(媤母)님 생신(生辰)때마다, 동네 노인(老人)들을 모시고 따뜻한 음식(飮食)을 대접(待接)하며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세심(細心)한 배려(配慮)도 아끼지 않았다.
늘 건강(健康)을 보살펴 드리고 좋은 곳을 구경(求景)시켜 드리는 등 그의 자상(仔詳)한 마음씨는 '孝' 바로 그것이었다.
자녀(子女)들에게도 항상 신앙심(信仰心)을 심어 주며 착실(着實)하게 살 것과 할머니께서 불편(不便)함이 없으시게 잘 보살펴 드리도록 교육(敎育)하고 있다.
효(孝)란 끝도 없고 한(限)도 없다고 말하는 김여사(金女史)는, "나의 오늘이 있음이 다 누구의 덕분(德分)이며, 누구로 인연(因緣)해서 내가 태어났겠는가?"라고 말을 하면서, 이웃들에게 경로의식(敬老意識)을 일깨워 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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