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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歲)의 어린 나이로 결혼(結婚)한 김영희(金永喜) 여사(女史)는, 결혼(結婚) 3일(日)만에 남편(男便)을 전쟁(戰爭)터로 보내고 시부모(媤父母)와 시(媤)누이 등 4인(人) 가족(家族)으로 가난한 가운데서도 행복(幸福)하고 단락(團樂)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청천벽력(靑天霹靂)이라고나 할까, 낙동강(洛東江) 전투(戰鬪)에서 남편(男便)이 전사(戰死)했다는 비보(悲報)가 날아옴으로써 김여사(金女史)는 하루아침에 17세(歲)의 어린 나이로 청상광부(靑孀寡婦)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까 김여사(金女史)는 결혼(結婚)을 한 후 불과(不過) 3일간(日間) 남편(男便)의 얼굴을 보고 그만 사별(死別)하고 말았으니, 운명(運命)의 장난치고는 너무나 가혹(苛酷)하지 않았는가, 김여사(金女史)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 며칠 동안을 목놓아 울면서 비통(悲痛)한 나날을 한숨으로 보냈다.
"네 인생(人生)을 불과(不過) 17세(歲)로 마감시킬 수는 없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재혼(再婚)하도록 해라." 친정(親庭)을 비롯한 여러 친지(親知)들의 이와 같은 충고(忠告)가 빗발쳤지만 그의 대답(對答)은 한결같이, "나는 이 집안의 귀신(鬼神)이 되기로 했다."는 그 말 한 마디뿐이었다.
고된 시집살이와 남편(男便) 없는 고독(孤獨)을 염려(念慮)하여, 친정(親庭)에 가서 있으라는 시(媤)어른들의 권유(勸誘)로 마지못해 친가(親家)로 돌아온 김여사(金女史)는, 잠시 친정(親庭)에 머문 후(後) 대전(大田)으로 가서 방직공장(紡織工場)에 취업(就業)을 했다.
15년간(年間)에 걸쳐 직장생활(職場生活)을 하면서 뼈를 깍는 고생(苦生)도 참고 견디며 푼푼이 돈을 모았다.
그러던 어느 날 시부(媤父)님이 위독(危篤)하다는 급전(急電)을 받고 다시 시댁(媤宅)으로 내려온 김여사(金女史)는, 극진히 정성(精誠)들여 구환(救患)했으나 보람도 없이 시부(媤父)님은 세상(世上)을 떠나고, 그 후(後) 시모(媤母)님마저 타계(他界)하고 말았다.
그 동안의 시부모(媤父母)님의 병환(病患)으로 생활(生活)이 더욱 어려워지자, 방직공장(紡織工場)에서 모은 돈 150만(萬)원으로 논 400평(坪)을 구입(購入)하여 지금까지 소유(所有)했던 1,000평(坪)의 전답(田畓) 과 더불어 1,400평(坪)의 농토(農土)를 혼자 힘으로 가꿔 나갔다.
시부모(媤父母)님을 여의고 혼자 몸이 된 김여사(金女史)는, 봉제사(奉祭祀)를 위한 대(代)를 이을 손(孫)이 없음에 대하여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의 혼인확인심판(婚姻確認審判)에 의(依)한 혼인신고(婚姻申告)를 지난 1976년(年)에 끝내고, 종시숙(從媤叔)의 아들을 입양(入養)시켜 대를 잇게 하였다. 이제 국민학교 5년생인 어린 양자(養子)와 함께 살면서 해마다 맞는 시부모님의 제사(祭祀)와 남편(男便) 제사(祭祀)는 물론이지만, 청명(淸明)·한식(寒食)·추석(秋夕) 등의 명절(名節)에는 입양(入養)한 아들을 동반(同伴)하고 성묘(省墓)를 다녀오는 등, 생전(生前)이나 사후(死後)에나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은 한결같았다.
효부(孝婦)와 열녀(烈女)로서 세상(世上)에 널리 알려진 그는, 마을에서 열행상(烈行賞)을 받은 것을 비롯해서, 유도회(儒道會) 선산군지부장(善山郡支部長)이 수여(授與)하는 효부상(孝婦賞)과 선산군수(善山郡守)의 효부표창(孝婦表彰)을 받는 등, 그의 효행(孝行)과 열행(烈行)은 선산군내(善山郡內)에서 평판(評判)이 자자하다.
훗날 죽어서 저승에 가도 다시 남편(男便)과 결혼(結婚)하고 시부모(媤父母)님과 더불어 살 것이라는 김여사(金女史). 그야말로 세상(世上)에 드문 효부(孝婦)이고 또한 열부(烈夫)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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