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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歲)의 어린 나이로 결혼(結婚)한 이분순(李分順) 여사(女史)는, 농토(農土) 한 평(坪)없는 가난 속에서 시모(媤母)님과 3명(名)의 시(媤)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중책(重責)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살아야만 하였다.
그런데 신혼(新婚)의 단꿈이 깨기도 전(前)에 군(軍)에 입대(入隊)한 남편(男便)이 전사(戰死)했다는 비극(悲劇)을 접(接)하게 됐고, 이로써 결혼생활(結婚生活)은 1년(年)으로 끝맺어야 하는 비극(悲劇)을 맞게 됐다.
그러니까 이여사(李女史)는 그의 나이 17세(歲)로 청상(靑孀)이 됐으니 세상(世上)에 이런 기막힌 일이 또 어디 있으랴?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슬픔으로 며칠 동안을 땅을 치며 통곡(痛哭)해 보았으나 앞길은 캄캄한 절망(絶望)일 뿐이었다.
시모(媤母)님을 비롯하여 친지(親知)들이 재가(再嫁)하라고 끈덕지게 권(勸)해 왔지만, 시모(媤母)님을 모셔야겠다는 갸륵한 일념(一念)과 죽은 남편(男便)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삼강(三綱)의 도(道)를 좇아, 재가(再嫁)의 권유(勸誘)를 뿌리치고 미망인(未亡人)의 길을 지키기로 굳게 결심(決心)했다. 시모(媤母)님을 편히 봉양(奉養)하고 아울러서 시(媤)동생들을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서 생계수단(生計手段)이 있어야만 하겠기에, 푼푼이 모은 돈으로 수동식(手動式) 국수틀 한 대를 구입(購入)했다. 국수틀을 머리에 이고 이 마을과 저 마을을 돌아다니며, 연약(軟弱)한 몸으로 하루 종일(終日) 국수틀을 돌려서 품삯을 벌어들인 이여사(李女史)는, 국수 주문(注文)이 없을 때는 품팔이로 끼니를 이어나갔으며, 농한기(農閑期)인 겨울철에는 새끼도 꼬고 가마니도 짜서 생계(生計)를 꾸려갔다.
그러던 중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화병(火病)이 생긴 시모(媤母)님은, 고질적(固疾的)인 위장병(胃腸病)까지 겹쳐 약(藥)으로 연명(延名)하는 딱한 처지(處地)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여사(李女史)는 시모(媤母)님의 구환(救患)을 위해 하루에도 몇 십리(十里)를 왕래(往來)하면서 좋은 약(藥)을 구(求)해다 복용(服用)토록 했는데, 그와 같은 간병(看病)은 지금까지 35년간(年間)이란 긴 세월(歲月) 동안 계속(繼續)해 오고 있으니, 그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이 얼마나 갸륵했는가를 알 수 있으리랴.
시댁(媤宅)을 위해 수십년간(數十年間) 희생(犧牲)해 온 이여사(李女史)는, 어려운 환경(環境)속에서도 시 (媤)동생들을 모두 교육(敎育)시켜 결혼(結婚)의 기쁨까지 안겨 주는 등, 그의 피나는 정성(精誠)은 정말 놀랍기만 하였다.
그 후(後) 큰 시(媤)동생의 아들을 양자(養子)로 맞아들인 이여사(李女史)는, 양자(養子)를 친자(親子) 이상(以上)으로 사랑하면서 전문대학(專門大學)까지 졸업(卒業)시키는 열성(熱誠)을 다하기도 하였다.
더우기 그는 비단 가정(家庭)에만 충실(忠實)한 것이 아니라, 1965년(年)부터 마을부녀회장(婦女會長)으로 활약(活躍)하면서 지금껏 많은 공적(功績)을 쌓기도 했는데, 20년(年) 동안 그가 남긴 실적(實績)을 보면, 첫째가 주민화합(住民和合)이었고, 둘째가 부촌(富村)의 꿈을 성취(成就)시킨 과수(果樹)심기운동(運動)이었으며, 셋째가 자조(自助)·자립(自立)·협동(協同)을 뿌리내리게 한 공(功)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금릉군수(金陵郡守)로부터 표창장(表彰狀)을 받기도 한 이여사(李女史)는, 남은 여생(餘生)도 시댁(媤宅)과 마을을 위해 한 목숨을 다 바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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