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장정자(張貞子)

페이지 정보

본문

제28회(1985년 4월 17일)
독행상(篤行賞)
경북 청도군 청도읍
효부(孝婦) 장정자(張貞子) 42세

6평(坪) 짜리 목조(木造)스레트 가옥(家屋)과 400평(坪)의 밭이, 일곱 식구(食口)의 가장(家長)인 장정자(張貞子) 여사(女史)의 전재산목록(全財産目錄)이렀다. 1966년(年)에 박용훈씨(朴龍勳氏)와 결혼(結婚)하여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역정(人生歷程)은 눈물의 가시밭길 그것이었다. 장여사(張女史)가 시집오던 날 누구보다 그를 얼싸안고 반긴 사람은, 남편(男便)보다도 벙어리인 시부(媤父)님과 앞 못 보는 시모(媤母)님이었는데, 시부(媤父)님은 86세(歲), 그리고 시모(媤母)님은 71세(歲)에 이른 오늘날까지도 며느리인 장여사(張女史)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이 고마워 눈물만 흘리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장여사(張女史)가 찢어지게 쪼들리는 가난에도 불평(不平) 한 마디 없이 가계(家計)를 돕기 위해 날품팔이를 하면서, 벙어리인 시부(媤父)님과 맹인(盲人)인 시모(媤母)님을 위해서 제이(弟二)의 심청(沈淸)이라 할 만큼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이들을 봉양(奉養)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남편(男便)이 갑작스러운 발병(發病)으로 종합병원(綜合病院)에 입원(入院)하게 되었고, 끝내 암(癌)으로 1983년(年) 7월(月)에 타계(他界)하는 비운(悲運)을 장여사(張女史)에게 안겨 주었다. 

이 때 이미 장여사(張女史)는 2남(男) 2녀(女)의 자녀(子女)를 두고 있었으므로 그의 슬픔은 더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그로부터 3개월 후(個月後), 시부(媤父)님은 중풍(中風)으로 병석(病席)에 눕는 몸이 되었다. 말 못하는 벙어리에다 중풍(中風)까지 겹쳤으니 한 시(時)도 환자(患者) 곁을 떠나지 못하고 간병(看病)해야만 했다. 

그 날부터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면서 조석식사(朝夕食事)도 그가 손수 떠먹여 드렸고, 목욕(沐浴)을 비롯한 빨래 등, 위생(衛生)과 청결(淸潔)에도 주력(注力)하면서 시부(媤父)님을 알뜰히 보살펴 드렸다. 

어디 그뿐이랴. 앞 못 보는 시모(媤母)님을 위해서도 손이 되고 발이 되고 지팡이가 되면서 지극(至極)한 정성(精誠)으로 봉양(奉養)해 온 박여사(朴女史)는 제이(第二)의 심청(沈淸) 그것이었다. 그렇다고 간병(看病)에만 매달려 있을 수만도 없었다. 생계(生計)를 위해 남의 집 품팔이와 고사리·칡·약초(藥草) 채취(採取) 등으로 어려운 생계(生計)를 이어 나가면서 시부(媤父)님 구환(救患)에 전심전력(全心全力)해 오기도 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했듯이 시부(媤父)님의 병세(病勢)는 하루가 다르게 호전(好轉)되어 갔다. 

"벙어리 시부(媤父)와 맹인(盲人) 시모(媤母)를 극진히 봉양(奉養)하고 있는 장여사(張女史)는, 인간애(人 間愛) 이상의 효부중(孝婦中)의 효부(孝婦)이다. 불구(不具)의 시부모(媤父母)를 모시고 있으면서도 단 한 마디의 불평(不平)을 하는 것을 목격(目擊)하지 못했으니, 세상(世上)에 이와 같은 효부(孝婦)가 또 어디 있겠는가?"라는 어느 동민(洞民)의 찬탄(讚歎)처 럼, 장여사(張女史)의 거룩한 인간애(人間愛)는 하늘도 감동(感動)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어려운 환경(環境) 속에서도 자녀(子女)들을 중학교(中學校)와 고등학교(高等學校)에 진학(進學)시키는 등, 비록 자신(自身)은 무학(無學)이긴 했지만, 자녀교육(子女敎育)에 대한 열정(熱情)은 불덩이처럼 뜨겁기만 하였다. 장여사(張女史)의 봉양(奉養)속에 점차 건강(健康)을 되찾고 있는 벙어리 시부(媤父)님은, 며느리인 그 여(女)에게 감사(感謝)해 마지 못하는 듯 장여사(張女史)와 눈이 마주 칠 때마다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