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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선(朴台仙) 여사(女史)는 110세(歲)의 시증조모(媤曾祖母)님, 85세(歲)의 시조부(媤祖父)님, 83세(歲)의 시조모(媤祖母)님, 그리고 63세(歲)의 시부모(媤父母)님, 이렇듯 4대(代) 가족(家族)이 한 집에 모여 살고 있는 집의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살고 있다. 좋은 혼처(婚處)를 외면(外面)하고 굳이 4대(代) 가족(家族)의 일원(一員)이 된 사유(事由)가 있었다면, 평소 그의 생활신조(生活信條)였던 '충(忠)·효(孝)·예(禮)'를 실천(實踐)을 통해 보여 주고 싶었다고나 할까. 박여사(朴女史)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성품(性品)도 온순(溫順)했을 뿐만 아니라, 어른을 공경(恭敬)하는 마음과 예절(禮節)이 발라서 언제나 칭찬(稱讚)의 대상(對象)이 되어왔다.
박여사(朴女史)는 그가 결혼(結婚)한지 4년(年)만에 시모(媤母)님이 별세(別世)함으로써 4대(代) 가족(家族)의 큰 짐을 한 몸에 떠맡게 됐는데, 무엇보다도 웃어른들을 별 탈없이 봉양(奉養)하는 일이 큰 걱정이었다. 그러나 박여사(朴女史)는 모든 일에 최선(最善)을 다하리라는 굳은 각오(覺悟)로 그날부터 그가 지닌 효심(孝心)을 모두 바치면서 열심히 가사(家事)를 돌보았다.
그의 효성(孝誠)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갸륵했으면 110세(歲)의 시증조모(媤曾祖母)님이 그를 귀여워한 나머지 하루가 멀다 할 정도(程度)로 자기(自己) 방(房)에 증손부(曾孫婦)를 불러들여 잠자리를 같이 했으랴, 시증조모(媤曾祖母)님은 남달리 박여사(朴女史)를 좋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국민학교(國民學校) 운동회(運動會)가 있을 때마다 그를 손수 등에 업고 1km가 넘는 학교(學校)까지 모셔다 구경(求景)시켜 드리는 일을 그 예(例)로 꼽을 수 있겠다.
특(特)히 지난 1983년(年) 겨울, 그의 시부(媤父)님이 장파열(腸破裂)로 대학병원(大學病院)에 입원(入院)해 있을 때, 남편(男便)도 없는 가정(家庭)을 혼자 지키며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산(山)에 가서 떌깜을 해다가 웃어른들을 따뜻하게 봉양(奉養)하는 등 2개월간(個月間)의 고역(苦役)은 2년(年)만큼이나 긴 고역(雇役)같기만 했다고 한다.
어디 그뿐이라. 시증조모(媤曾祖母)님을 비롯한 시조부모(媤祖父母)님 모두가 노령(老齡)으로 화장실(化粧室) 출입(出入)도 자유(自由)롭지 못하자 이 방(房), 저 방(房)을 쉴 새 없이 드나들면서 대소변(大小便)을 받아내기도 했고, 노인방(老人房)에서 풍기는 냄새를 없애기 위해 하루에도 몇 차례나 쓸고 닦는 등 극진한 효성(孝誠)을 다해 봉양(奉養)했다.
국회의원(國會議員) 선거일(選擧日)에도 박여사(朴女史)가 손수 시증조모(媤曾祖母)님을 등에 업고, 그 밖의 웃어른들과 함께 역표장(役票場)에 나가기도 한 그는, 당일(當日) 신문(新聞)과 방송(放送) 등 매스컴의 각광(脚光)을 받으면서 역표장(役票場)에 모여든 사람들로부터 우렁찬 박수갈채(拍手喝采)를 받기도 한 바 있다.
"젊은 여성(女性)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에 하느님도 박수(拍手)를 보낼 것입니다. 4대(代) 가족(家族)의 웃어른들을 모시면서 단 한번도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못 보았습니다."라는 그를 지켜본 인근주민(隣近住民)의 말과 같이 박여사(朴女史)는 결혼후(結婚後) 그 흔해빠진 당일(當日)치기 관광여행(觀光旅行)도 한 번 다녀온 일이 없을 만큼 그의 효심(孝心)은 두텁기만 하였다.
비둘기처럼 정(情)답기만 한 4대(代) 가족(家族)들은, 오늘도 박여사(朴女史)의 따뜻한 효심(孝心) 속에 마음껏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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