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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대(金玉大) 여사(女史)는 20세(歲) 되던 해에 결혼(結婚)했지만 기구(崎嶇)하게도 일찌기 남편(男便)과 사별(死別)하고 재혼(再婚)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남편(男便)한테는 첫칠도 채 지나지 않은 갓난아이가 있어서 김여사(金女史)가 이를 키워야만 했다. 더우기 갓난아기는 병명(病名)을 알 수 없는 중병(重病)으로 사경(死境)에서 헤매고 있었으니 그의 심정(心情)인들 오죽 괴로왔으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아이만은 살려야 한다. 내가 낳은 자식(子息)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김여사(金女史)는 그 날부터 병원(病院)과 약국(藥局)을 돌아다니면서 가까스로 병명(病名)은 알아냈지만 막대(莫大)한 입원비(入院費)만은 어쩔 도리(道理)가 없었다.
"여보, 땅을 팔아서 아기를 살려 놓읍시다. 어때요, 당신 생각은?"
농토(農土)를 판다는 말에 남편(男便)은 펄쩍 뛰면서 반대의사(反對意思)를 표시(表示)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농토(農土)라야 고작 400평(坪)이 전부(全部)였는데, 바로 그 400평(坪)의 땅이 곧 이들의 밥줄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신, 아기가 더 중요(重要)해요? 아니면 땅이 더 소중(所重)해요? 목숨부터 살려놓고 봅시다."
김여사(金女史)의 간곡한 설득(說得)으로 땅을 처분(處分)하게 됐고, 이어서 입원가료(入院加療)한 결과 씻은 듯이 건강(健康)도 회복(回復)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측(豫測)한 대로 엄청나게 무서운 가난이 뒤따랐지만, 김여사(金女史)는 이에 조금도 실망(失望)하지 않고 굴(屈)하지도 않고 남편(男便)과 더불어 품팔이와 막노동(勞動) 등, 손에 잡히는 대로 억척스럽게 일을 하여 어려운 가계(家計)를 이어 나갔다.
그러는 가운데, 이번에는 시조모(媤祖母)님이 중풍(中風)으로 눕게 되어 지금껏 10여년(餘年) 동안을 정성(精誠)들여 간병(看病)해 왔다. 10여년(餘年)을 하루같이 대소변(大小便)을 손수 받아냈지만 단 한 번도 짜증을 내는 일이 없을 만큼 그의 성품(性品)은 제이(弟二)의 천사(天使) 그것이었다.
어떤 날은 꼬박 곁에 앉아서 간호(看護)를 하다가 그 자신(自身)이 환자(患者) 곁에 쓰러져 의식(意識)을 잃어버린 일도 있을 만큼 그의 효성(孝誠)은 하늘도 감동(感動)할 정도였다.
특(特)히 시조모(媤祖母)님의 외로움을 달래 드리기 위해서는 가끔 동네 노인(路人)들을 자택(自宅)으로 초청(招請)하여 음식(飮食)을 대접(待接)하기도 하였다.
5남매(男妹)의 어머니이기도 한 김여사(金女史)는, 비록 가난하긴 했지만 자녀교육(子女敎育)에도 남다른 열의(熱意)를 가져, 중학교(中學校)와 고등학교(高等學校)에서 각기 공부(工夫)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 주는 등, 간병(看病) 틈틈이 자녀교육(子女敎育)에도 힘써 왔다.
그의 효행(孝行)이 세상(世上)에 널리 알려져, 경상북도(慶尙北道) 지사(知事)가 수여(授與)하는 표창장(表彰狀)을 받은 바도 있는 그는, 동네의 궂은 일도 도맡아서 할 만큼, 누구보다도 앞장서 일을 하여 '욕심(慾心) 많은 일꾼'이라는 별명(別名)을 듣기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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